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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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10년

이번 주 두 가지 이야기

백화골 2010. 9. 11. 01:02

#1. 맑은 날은 어디로?

얼마 전에 가족회원 한 분이랑 전화 통화를 했는데, 오이를 좀 많이 주문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즘 오이가 하도 안 자라서 죄송하지만 많이 보내드릴 양이 없다고 하니까 “오이가 왜 안 자라나요?”하고 물어보시더군요. 요즘 오이 뿐 아니라 애호박, 고추, 쌈채소.. 다들 잘 자라지 못하고 있답니다. 왜 안 자라는지는 하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균병 걸린 오이

탄저병 걸린 고추

장마 땐 장마라 비오고, 태풍 땐 태풍이라 비오더니 요즘은 장마도 아니고 태풍도 다 지나갔으면서 왜 이렇게 끊임없이 비가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쨍하게 맑은 날 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어요. 밭은 진흙탕처럼 발이 쑥쑥 빠지고, 곰팡이 병은 이미 왠만한 잎사귀들은 다 덮고 간 지 오래고, 습한 날씨가 계속되다보니 고추밭 탄저병과 오이밭 노균병이 사이좋게 손잡고 오고...

엊그제는 마트에 가서 농산물 가격들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작은 애호박이 한 개에 거의 4천원이더군요. 오이는 2개 묶어놓고 2천5백원. 요즘 농산물 값 비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농산물 값이 이렇게 오르면 농민들이 돈을 많이 벌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농산물 값이 괜히 오르는 게 아니라 그만큼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니까요. 아랫마을에서 상추 농사짓는 이장님은 평소에 하루 20박스 따던 상추밭에서 요즘엔 4박스밖에 못 딴다고 하시더군요. 출하하기만 하면 돈인데, 좀처럼 자라지가 않아 못 내니까 속이 상한다며 울상입니다. 그러고 보면 농민들에겐 풍작 돼서 똥값 받거나, 금값인데 흉작이거나 두 가지 길밖에 없는 것 같아 한숨이 나옵니다.

누구네 논인지 몰라도 지난 번 태풍 때 쓰러진 벼를 아직까지 일으켜 세우지 못한 걸 보면 일손이 딸려 엄두를 못 내고 있나 봅니다. 태풍이 빗겨 지나간 장수에서도 벼가 곳곳에서 꽤 많이 쓰러졌는데, 저 남쪽이랑 중부권에서는 아마 더 심할 테지요. 작년엔 벼농사가 풍년이 든 데다 쌀 수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남아도는 쌀로 전국에 난리가 났었는데, 올해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쌀이 이렇게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걸 생각하면 쓰러진 벼 힘들게 일으켜 세울 의욕도 별로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 고라니의 저주

이번 주엔 고라니 때문에 마을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은 약 5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과밭에서 한참 일손돕기를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마을 이웃 모씨와 모씨가 같이 차를 타고 근방을 지나가고 있던 중 갑자기 뛰어든 고라니가 차에 치어 죽었다는 것, 그 고라니 고기를 삶아서 마을 회식을 할 예정이니 저녁 때 회관으로 반찬 싸가지고 모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희는 사과밭 일이 늦게 끝나기도 했고, 차에 치어 죽은 고라니 고기를 별로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 불참했는데, 다음날 아침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고라니 고기가 굉장히 맛있었다고 하더군요. 죽은 고라니를 손질하는 일은 차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이 같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의 밭이 고라니의 습격으로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갓 심은 가을배추 모종을 절반 정도 뽑아 먹고 갔더군요. 고라니는 조심성이 많은 동물이라 밭에 들어오더라도 여남은 개 안쪽으로 먹고 가는 게 보통인데, 그렇게 밭의 절반 정도를 몽땅 먹어치운 건 처음 봤습니다.

밭주인은 투덜거리며 새 배추 모종을 구해다가 파먹은 자리를 모두 새로 심어놓았는데, 그 다음날 아침 밭에서 가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밭이 온통 고라니 발자국인데, 거의 밭 전체를 다 휩쓸며 먹고 갔지 뭐예요. 세 번째로 배추 모종을 심고, 이번에는 밭 주위에 말뚝을 박고서 폐 현수막으로 울타리까지 쳐놓았습니다.

다음 날 또 고라니 습격. 또 배추 모종 구해다 심고(이제는 배추 모종을 더 구할 데도 없어서 아주 어렵게 구했다고 합니다) 울타리를 좀 더 촘촘히 치고 이제는 됐겠지 한 게 어제 일인데, 오늘 아침에 보니 어느 틈으로 들어왔는지 또 들어와 배추를 먹어치우고 갔습니다.

이웃이 올해 가을배추 농사를 포기할지, 아니면 누가 이기나 보자 하고 이를 악물고 계속 배추를 심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파라오의 저주보다 더 무서운 고라니의 저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