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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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10년

‘땅의 여자’를 보았습니다

백화골 2010. 9. 21. 07:43

남편이 인터넷으로 한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는 눈을 떼지를 못합니다.  보고 싶은 영화는 어떤 수를 내서라도 극장에 가서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편입니다. 그래서 봤습니다. 장수에서 가장 가까운 상영관인 진주까지 고속도로 타고 달려가서 봤습니다. 다큐멘터리 ‘땅의 여자’입니다.

경상도 땅에 귀농해 10여 년 농사짓고 사는 세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 여자가 같이 사는 건 아니고 진주, 창녕, 합천에서 각각 가정 꾸리고 농사지으며 사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반응들 중에 “다큐멘터리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는 말들이 많던데, 사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땅의 여자’처럼 팔딱팔딱 뛰는 생생한 삶에 바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은 다큐라면 더더욱 그러하고요. 

감독의 말을 들어보니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의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질 때까지 세 농가를 돌아다니며 몇 달 동안은 그저 농사일만 거들었다고 하더군요. 역시 다큐나 된장이나 좋은 작품이 나오려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법인가 봅니다.

세 여자는 원래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는데, 모두 농민 운동에 뜻을 품고 비슷한 시기에 농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각각 참한 농촌 총각들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고, 농사일과 농민운동을 하면서 참 열심히도 살아갑니다. 우리네 삶이 다 그렇듯이 때론 지지고 볶으며 싸움도 하고 갈등도 생기고 눈물도 흘리지만, 선한 의지와 희망으로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모습들이 참 건강해보였습니다. 

마침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간 날 우연히도 영화 상영 후 주인공들과 관객과의 대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영화 안의 모습이나 밖의 모습이나 똑같이 명랑하고 당당하고 꾸밈없어 보이더군요.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과 주인공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귀농해 농사짓고 사는 비슷한 처지이다 보니 남의 일 같지 않고, 공감도 많이 가더군요.

하지만 제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세 주인공보다는 그 중 한 분의 시어머니로 나오는 할머니였습니다. 흙빛으로 깊게 패인 주름이 말해주듯 평생 어마어마한 노동을 감당해오신 분, 농민운동으로 바쁜 아들 며느리를 항상 든든히 지원해주는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신 분. 

영화 속에서 바스라질 듯 가녀린 몸으로 손수 경운기를 운전하시더군요. 경운기 운전은 위험하고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여자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젊은 여자도 아닌 할머니가 경운기 운전대를 잡은 건 그만큼 자기 말고는 일 할 사람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할머니가 집안의 큰일을 치르고 난 뒤 농촌 생활을 접고, 진주 시내에 방 한 칸 얻어 혼자 나가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50년 동안 농사지었어. 이제 나도 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영화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때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듯 던지는 이 말이 가슴을 울리더군요. 한 50년 농사짓고 나면 저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사람답게 살고 싶어 농촌으로 들어온 저희로서는 50년 동안 ‘사람 답지 않게’ 살면서도 묵묵히 농촌을 지켜주신 할머니에게 그저 감사하단 말씀밖에 드릴 게 없네요. 무릎 아프면 찜질방에도 가고, 노인회관에서 동네분들이랑 맛난 것도 나눠 드시면서 도시에서 느긋하고 여유 있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땅의 여자’, ‘땅의 남자’ 자리는 부족하지만 이제 저희들이 물려받아 지지고 볶고 투닥투닥 하면서도 끈질기게 지켜가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