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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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07년~2008년

가뭄에 고구마 캐다 (2008.10.14)

백화골 2009. 3. 4. 13:06

언제부터 비가 안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오는 날씨가 어떤 것인지 잊어버릴 정도로 매일 해가 쨍쨍 뜬다. 가랑비가 잠시 내리다가도 금세 그친다. 다음날 오후부터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다시 흙먼지가 풀풀 날린다. 이 지역에선 서리가 일찍 내린다. 10월 중순부터는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추위에 약한 고구마나 야콘 같은 식물은 서리를 맞으면 장기 저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서리 내리기 전에 반드시 캐야 한다. 요즘 1주일 넘게 고구마를 캐고 있다.

땅이 쩍쩍 갈라져 있다. 고구마 순도 말라 비틀어버릴 지경. 이 메마른 땅을 힘겹게 헤집으며 고구마를 캔다. 일손이 부족해서 여기저기 연락을 해 봐도, 지금은 ‘단풍놀이철’이라 농촌에 와서 일 도와줄 사람을 찾기 힘들다.

땅이 마르면 고구마는 점점 더 땅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지뢰를 찾아 캐는 기분이다. 어찌 이리도 고구마가 깊이 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돌덩이나 다름없는 흙덩이를 이리 쪼고 저리 쪼아가며 겨우겨우 고구마를 꺼낸다. 하도 고구마 캐는 일을 오래 하다보니 꿈에서도 고구마를 캔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한 마디씩 하고 간다. 다 똑같은 말이다. “경운기나 트렉터로 캐라”, “이렇게 가물어서야 고구마 캐기 힘들지”, “품삯도 안 나오겠네”, “오늘도 캐나?”, “로터리를 낮게 쳐야 고구마가 깊이 안 들어가지”... 

'누가 그걸 모르나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 만다. 어지간하면 경운기나 트렉터에 쟁기를 달아서 캐고 싶은데 땅이 하도 딱딱하게 말라 기계날이 부러지게 생겼고, 품삯도 안 나오는 건 모든 농사가 다 마찬가지고, 로터리를 낮게 쳐놓아도 날이 가물면 고구마가 땅 속 깊이 들어간다.

그래도 아랫마을 이장님이 아주 도움이 되는 정보 한 가지를 주셨다. 고구마 캐기 전용 슈퍼 삼지창! 삽이나 일반 삼지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땅 속 깊이 들어가고, 특수 합금 강철이라 부러지지도 않는다. 곡괭이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땅을 들썩여놓기 때문에 고구마도 잘 상하지 않는다. 이 슈퍼 삼지창(엄밀히 말하자면 사지창) 덕분에 시간도 절약하고 고구마도 기스 안 내고 캐고 있다.

그냥 삽 옆에 나도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루종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니 이 생각 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올 한 해 농사에 대해 분석하고 반성도 해본다. 올해 고구마는 우리가 좀 욕심을 부려 많이 심은 것 같다.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더 많은 농지를 확보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작은 땅이라도 더 알차게 농사짓는 게 행복한 농부가 되는 길이다. 내년에는 올해의 시행착오를 교훈삼아 더 효율적으로 농사지어야지 하는 다짐을 한다.

하루해가 짧아 일할 시간도 많지 않다. 힘들게 캔 고구마가 모양이 좋지 않아 속상하다. 땅 속에서 굼벵이와 땅강아지들이 아주 고구마를 가지고 잔치를 벌여놓았다. 어쩌다 벌레들의 공격을 피한 놈들도 이상하게 겉껍질 색깔이 거무튀튀한 것들이 많다. 우리만 그런 줄 알았더니 주변 농가들 상황도 비슷하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지독한 가뭄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힘들게 일하다 들어와 보면 깜박 잊고 밥을 안 해놓은 날이 있다. 이럴 땐 팔지 못하는 못난이 고구마를 몇 개 찐다. 먹다가 쓰러질 정도로 달고 맛있다. 가뭄으로 고구마 맛 하나는 기가 막히게 들었다.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