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박정선, 조계환/울주군 두서면 내와1길3/유기농인증번호 : 07100003/연락처 : 010-2336-0748

농부의 하루/2007년~2008년

여름 끝 가을 시작 (2008.08.18)

백화골 2009. 3. 4. 12:55

며칠 새 더위가 사라졌다. 한낮에도 많이 움직이지 않으면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다. 아침저녁으로는 전형적인 가을바람이 분다. 세수하고 나면 얼굴이 땅긴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이번 여름은 다행히 큰 비나 바람, 태풍이 없어 농사짓는데 좋았다. 적당히 비가 내렸고 더웠다. 일기예보는 계속 틀렸지만 오보를 예상하고 일하니 평안했다. 농작물은 잘 자랐고, 우리는 지난 3년간의 영농일지를 참고하여 병충해 방제를 하고 씨앗을 넣고 작물을 관리했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여름이었다.

귀농해서 가장 기분 좋은 일 하나가 빨래가 잘 마른다는 것이다. 도시처럼 나쁜 냄새가 들어설 틈도 없고, 날씨만 화창하면 몇 시간 사이에 깨끗하게 빨래가 마른다. 내친 김에 이불들이며 의자까지 내다 말린다. 잘 마른 빨래에서 나는 햇살 냄새가 참 기분 좋다.   

매일 해지는 것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올 여름엔 땀을 어찌나 많이 흘렸는지, 사람 몸속에 이렇게나 많은 물이 들어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 정도였다. 몸은 고된 일상이지만 일 끝나고 저녁을 맞을 때면 항상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재배하는 농산물들로 밥상을 차리고 소식하며 지내니 뱃살은 붙을 틈이 없고 몸무게도 5kg나 줄어들었다. 

밭에서 일할 때면 항상 참 고요한데, 말없이 바람 소리, 새소리, 벌레 소리만 들으며 일하다보니 조리 있게 말도 잘 안 나올 지경이다. 때에 따라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음... 그게 뭐지? 이런 걸 뭐라고 하지?”를 달고 살던 차에 여름 휴가철을 맞아 많은 손님들이 다녀갔다. 도시 손님들은 귀중한 말벗이 되었고, 잠시나마 함께 일하는 좋은 농부가 되어 주었다. 약간은 벅차게 준비해야할 가을 농사 준비를 손님들이 보태어준 일손 덕분에 차근차근 잘 마무리하고 있다.

올 여름 제일 잘 자란 작물이라면 옥수수다. 기분 좋게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갔다. 시간차를 두고 따려고 1차, 2차, 3차, 4차까지 시기를 조정해서 심었는데, 1, 2차로 심은 옥수수는 벌써 수확을 거의 끝내 잎이 노랗게 말라있다. 3, 4차 옥수수도 계속 풍작을 이어가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불청객이 나타났다.

고라니가 휩쓸고 간 옥수수밭이다. 수확을 앞둔 옥수수의 1/3 이상이 고라니 먹이가 됐다. 그저께는 새로 심은 양배추 새싹을 고라니가 뜯어먹으면서 아예 뿌리까지 다 뽑아버리는 바람에 급기야 밭 주변에 대대적으로 울타리 치는 작업을 했다. 

농사짓는 것은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인 만큼, 어떻게 보면 자연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해충, 잡초, 해조, 그리고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까지.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우리지만 ‘새 한입, 벌레 한입, 사람 한입’ 운운하는 말은 사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린다. 울타리가 효과를 발휘해 고라니가 다시는 밭에 얼씬도 못하길 바랄 뿐이다.

해마다 실패하던 참외 농사가 4년 만에 성공했다. 참외는 각종 병충해를 많이 타는 작물이라 유기농으로 재배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올해도 초기에 진딧물과 흰가루병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가던 차에 끈질긴 친환경 방제 덕에 살아나 수확까지 하게 됐다. 물론 절반의 성공이다. 초기에 잎이 완전히 죽어버린 것들이 많아 수확량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여름 햇살에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를 보니 기분이 참 좋다.

하하우스 고추는 땅만 잘 만들어 놓으면 8월 중순까지는 별 문제 없이 잘 큰다. 8월 말이 되면 성장세가 둔해지면서 고추가 비실비실해지고 결국 탄저병이 오기 시작한다. 다행히 아직까지 우리 고추는 잘 자라고 있다. 4년째 유기농으로 농사지은 땅심 덕인 듯하다.   

왼쪽이 직접 씨를 받아 재배한 토종 오이, 오른쪽이 개량종 가시오이다. 대대로 우리 조상들이 먹었던 토종 오이를 올해 처음으로 재배해봤다. 꼭 조선 사람 같다. 작고 단단하다. 맛도 좋다. 하지만 크기가 너무 작은 데다 잎만 무성하고 수확량도 아주 적다. 하루만 늦게 따도 확 늙어버리기 일쑤고. 한번 재배해보니 농부들이 왜 개량 품종을 키우는지 절절히 알 것 같다.   

참깨는 처음에 발아시키기가 쉽지 않아서 재배가 어렵다고들 한다. 우리도 참 힘들게 발아를 시켰다. 풀도 엄청 자라는 바람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풀을 뽑아 주었고. 다행히 발아된 참깨들은 아주 잘 자랐다. 남은 기간 동안에도 잘 자라서 올 가을엔 ‘깨가 쏟아진다’는 게 무엇인지 체험으로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 작물이 무엇일까~요?” 물어보면 주변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우리도 올해 처음 심으면서 알게 된 작물인데, 열매가 달리기 전인 지금부터 잎에서 나는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결명자다. 생 결명자 향기가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알았다. 원두 커피 향 같기도 하다.

잎은 아까시 나무 잎사귀와 비슷하고, 잘 큰 놈들은 벌써 사람 키만큼 높이 자랐다. 농촌에서 일하다보면 강한 햇살 때문에 시력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는데, 올 가을엔 눈에 좋은 결명자차 실컷 마셔야지.

수수는 아주 아주 쉬운 작물이다. 풀도 안 뽑아 줬는데 알아서 훌쩍 자라더니 열매를 맺었다. 우리가 재배하는 작물 중 가장 쉬운 작물이 아닐까?  

울타리용으로 율무도 조금 심어봤는데, 역시 엄청 잘 자라고 키가 크다. 베어내서 말리고 털 생각을 하면 조금 막막하기는 하다.   

거름을 별로 많이 넣지도 않았는데 고구마 줄기가 엄청나게 잘 자란다. 올해 새로 빌린 땅이 고구마와 잘 맞나 보다. 하지만 줄기와 잎이 너무 무성해지면 뿌리가 들지 않는다. 너무 잘 자라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고구마 줄기를 쳐내느라 정신없다.

마을에서 꼬마들을 위해 설치한 수영장이다. 여름 내내 마을 아이들 모두 이 작은 수영장에서 잘들 놀았다. 시원해지고 나서부터 아이들이 잘 찾지 않아 마치 철 지난 해수욕장 같은 풍경이다.

벌써부터 올 겨울이 걱정이다. 장수의 겨울은 매섭게 춥다. 일찌감치 상판 작업하는 일꾼에게서 참나무 장작을 넉넉히 사놓았다. 잘라서 쌓아놓는 게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가올 추위를 생각하면 나뭇더미만 봐도 마음이 든든하다. 앞으로 다가올 계절을 생각하고 대비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하루하루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매일 매일을 계획하고 느끼고 흙과 함께 어울리는 생활은 참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