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박정선, 조계환/울주군 두서면 내와1길3/유기농인증번호 : 07100003/연락처 : 010-2336-0748

농부의 하루/2007년~2008년

가을 농사 이것저것 & 사과밭에서 보낸 7년(같은 3일) (2008.09.08)

백화골 2009. 3. 4. 12:59

 

장수의 가을 아침은 산 중턱에 깔리는 안개와 함께 시작된다. 비지땀 흐르는 한여름과 덜덜 떨리는 초겨울을 오가는 낮과 밤의 큰 일교차를 중재해주는 듯하다. 농촌에서 가을은 풍성한 잔치의 계절! 수확의 기쁨이 농부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해준다.

지난 몇 년간 가을 준비 과정에서 아쉬웠던 점들을 되새기며 올해엔 제대로 가을 준비를 했다. 김장배추와 무, 가을 양배추와 감자, 비트 등 가을 작물을 미리 미리 모두 심고, 겨울에 땔 나무를 다 베어 놨다. 올 겨울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수수가 하루가 다르게 빨그레 익어간다. 가을 하늘과 어우러지는 색감이 멋지다.

작년에 김장배추 심을 시기를 가을 장마 때문에 놓쳐 한이 맺혔다. 올해엔 반드시 배추 농사를 제대로 해보리라 다짐을 했다. 그것도 부드러운 배추로 말이다. 몇 년간 노지에서 배추를 키웠더니 맛은 달고 고소한데 부드럽지 않고 뻣뻣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특히 아버지가 제일 불평이셨다^^). 

그래서 올해엔 아예 하우스에 배추를 심었다. 화학비료를 치지 않는 유기농 배추는 노지에 심을 경우 성장 속도가 느려 속은 덜 차고 잎은 억세지는 경우가 많다. 하우스에서 키우면 물을 자주 줄 수 있기 때문에 잎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다행히 심은 지 며칠 안 됐는데도 쑥쑥 자라나 볼 때마다 맛있는 김장배추가 기대된다.

매해 가을마다 우리 입맛을 돋우던 양상추도 아주 잘 자라고 있다. 양상추는 봄과 여름, 가을 다 심어봤는데 가을이 제 맛이다. 부드럽고 아삭거리며 향이 살아있다. 특히 양상추는 고기에 쌈으로 먹으면 기막히다. 이 양상추 포기가 다 찰 때쯤 좋은 벗들과 함께 맛있는 장수고기에 쌈으로 곁들여 먹으며 올해 농사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면 멋지겠다.

김장 무도 씨를 넣고 계속 가물었는데도 싹이 잘 돋아났다.

고라니가 새싹을 파먹는 바람에 속 썩였던 빨간 양배추, 시련 끝에 살아남은 놈들이다. 양배추 냄새를 맡고 어김없이 나비 떼가 달려든다. 나비가 다녀간 곳에 남는 것은... 청벌레.

비트 새싹도 힘차게 뻗어 오르고 있고.

가을 감자 싹이 마구마구 올라오고 있다. 이번 가을 감자는 우리에게 일종의 실험이었다. 가족회원제를 하다 보니 매년 새로운 작물에 도전하게 되는데, 가을감자는 올해 처음 심어본 것이다. 그런데 이 감자를 두고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했다. 가을 감자는 잘 안 된다, 해봤는데 완전히 망했다, 발아율이 떨어지고 제대로 크지 않는다 등등. 

농사 고수들에게 물어보니 이 지역에선 8월 15일 쯤 가을 감자를 심는데, 이때가 워낙 더울 때라 땅 속에서 씨감자가 녹아버리기 쉽단다. 게다가 싹이 나오더라도 가을에 일찍 온도가 내려가 버리면 많이 크지 못한다고 한다. 특히 기온이 떨어질 때 검은 비닐 멀칭을 한 상태면 지온이 더 내려가서 감자가 덜 큰다는 것이다. 

우리는 8월 15일보다 1~2주 일찍 감자를 넣었는데, 다행히 그 이후 몇 주 동안 흐린 날이 많고 폭염이 없었던 덕에 씨 넣은 지 한 달 정도 지난 요즘 감자싹이 예쁘게 쑥쑥 올라오고 있다. 9월말쯤 기온이 내려가면 검은 멀칭 비닐을 모두 걷어내고 북주기와 추비주기를 하여 알이 잘 차도록 할 예정이다.

질기다 질겨. 조선 사람 끈질기고 질기다더니 토종 오이 오래간다. 개량종은 벌써 끝났는데, 토종 오이는 계속 살아서 새 순이 나고 오이가 열린다. 하우스 천장을 타고 다녀서 사다리를 놓고 오이를 딴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이렇게 질긴 민족성은 왠지 사라져버린 듯 하여 아쉽다. 민족주의는 싫어하지만 괜찮은 습성, 전통은 살아나면 좋을 텐데. 요즘엔 늙은 오이인 노각을 회원들한테 보내고 있다.  

이제 사과밭에서 왜 7년(같은 3일)을 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 

최근 친하게 된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 장수에서 20년 가까이 농사를 지어온 본토박이 농부다. 동갑내기를 만나기 쉽지 않은 곳이라 금세 친하게 됐다. 사과 농사를 주로 짓는데, 한번 농장에 놀러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알은 작지만 아주 맛있는 배를 사과밭 주변에서 따다 준다. 그냥 노는 땅이 있어서 사과밭 한 귀퉁이에 몇 그루 심은 거란다.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회원들에게 보내려고 100kg를 주문했다.

배를 가지러 가 트럭에 실은 뒤 얼마 주면 되랴, 하고 물으니 그냥 가져가란다. 소문에 농사 잘 짓고 사람 좋은 친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리 주문한 것이고, 100kg면 꽤 많은 양이라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냥 줄 게 따로 있지 이건 아니다 싶어 돈을 지불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한 마디 한다. “정 그러면 시간 있을 때 와서 일이나 좀 도와줘.”

헉! 공약미 삼백 석에 팔려간 심청이처럼 완전히 코 꿰어버렸다.

올해 우리가 세운 원칙 중의 하나가 돈 받고 품 파는 농사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을 받고 일하면 왠지 회사 나가서 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친한 사람하고 돈 주고받는 것도 영 기분이 찜찜하다. 가족회원제 덕분에 따로 용돈 벌이 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먹고 살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 추석 대목 바쁜 철에는 친한 농가들을 돌며 일하듯 즐기듯 편한 마음으로 일손돕기를 할 계획이었다. 이랬던 것이 공짜 배 100kg 때문에 ‘즐기듯’은 빠지고 빚을 갚는 심정으로 ‘필사적으로’ 3일 동안 사과밭에 출근하게 된 것이다.

얼른 가서 일해줘야 하는데, 하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서둘러 가을 작물들을 끝낸 뒤 지난 금요일 오후부터 친구네 사과밭에 나갔다. 추석 전 엄청난 물량을 출하해야 하기 때문에 다들 숨넘어가게 바쁜데, 10년 넘게 사과 농사 지은 사람답게 일 처리가 아주 베테랑이다.

부부가 손발이 척척 맞고 일 처리며 분담이 아주 합리적이다. 남편 집 6남매, 처갓집 9남매 가족들이 대거 몰려와서 바쁜 일손을 돕고 있다. 베트남, 태국에서 온 일꾼들도 함께 일하고 있었다. 부부가 사람들을 어찌나 잘 부리는지 일처리가 빠르다. 사람들의 특성을 파악해서 제대로 일을 시킨다. 우왕좌왕할 일도 없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 밤늦도록 눈빛이 반짝 반짝 한다.

어렵고 척박한 농촌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년간 농사지으며 안 해본 농사가 없고 이리 망하고 저리 망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온갖 역경을 이기고 이제 제대로 일어선 모습이다. 이렇게 농사 잘 짓고 잘 팔고 열심히 일하며 행복할 수 있다면 대규모 농사도 괜찮겠다 싶다.

5톤 차 가득 사과가 실렸다. 주인이나 잠시 거들어주러 온 사람이나 모두 뿌듯한 마음으로 사진도 찍고 즐거워한다. 서울 가락동 시장까지 내리 달려 새벽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라고 한다. 다음 날 물어보니 낙찰가가 아주 좋게 나왔단다. 우리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밤이 되자 여기저기서 또 사람들이 몰려온다. 우리처럼 신세진 친구들인가? 주변에서 바쁜 것을 알고 자기 일 마치고 오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놀랐다. 늦은 밤이 되어도 모두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 주인 부부는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며칠 째 일하고 있다. 

우리는 새벽에 우리 일을 보고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일했는데, 정말 노동 강도가 셌다. 농사 잘 짓고 돈 잘 버는 농부를 보니 이것저것 배울 것이 많아 좋기도 했지만, 회사 나가듯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은 좀 힘들었다. 쉬지 않고 일하니 몸도 힘들기도 했고. 

이러저러하게 평화롭기만 하던 우리 일상에서 이번에 사과밭에서 보낸 3일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오늘 추석 전 마지막 택배를 보내고, 우리 일이 좀 한가해진 틈을 봐서 또 바쁜 형님들 밭을 돌며 일손돕기를 할 계획이다. 올 추석은 모두모두에게 행복한 소식만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