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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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07년~2008년

야생동물들과 함께 한 하루 (2008.07.14)

백화골 2009. 3. 4. 12:49

지난 주말부터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면서 폭염이 한풀 꺾였다. 해가 쨍쨍 떴다가 소나기가 퍼붓다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하늘이 변덕을 부리기는 하지만 일하기 나쁘진 않다. 오늘 아침엔 토마토와 오이를 수확하러 산 입구에 있는 하우스에 들어가려는데, 뭔가 휙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철렁했다. 뱀을 그동안 많이 봐서 어지간한 놈은 장화 신은 발로 들어 던지기까지 하는데, 이 뱀은 정말 크다. 머리도 삼각형으로 뾰족한 것이 독사인 것 같다.

 이놈이 혀를 낼름낼름 내밀더니 하필이면 하우스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냥 두면 큰일나겠다 싶어 긴 막대기를 가지고 올라와 보니 토마토와 고추를 오가며 이리저리 설치고 다닌다. 한참 따라다니며 잡으려다 그만 놓쳤다. 할 수 없이 그냥 하우스 안에서 일하는데 살짝 등골이 오싹하다.

무성한 토마토 잎을 헤치고 골 반대편 쪽 열매를 따기 위해 손을 쑥 내밀 때마다 뱀이 대가리를 쑥 내밀 것만 같다. 다행히 어디로 사라졌는지 뱀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과 함께 생활하는 건 좋지만 독사는 좀 무섭다.

오전에 이것저것 수확을 마치고 오후 일을 시작했다. 이번엔 아침에 혼이 났던 하우스 옆 자투리 땅에 심어놓은 옥수수밭 풀 정리. 며칠 새 풀이 엄청나게 자랐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며칠 전에 심은 옥수수 새싹이 짓밟히고 씨앗을 파먹은 흔적이 있다. 고라니 발자국이다.

‘고라니가 많이도 밟아놨네’ 생각하며 발에 걸리는 돌을 집어 무심코 밭 옆 수풀에 던졌는데 이게 왠 일인가! 거짓말처럼 수풀 속에서 고라니 머리가 쑥 나오더니 정신 없이 껑충거리며 도망간다. 옥수수밭 옆에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 풀을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수풀이 무성해져 고라니 은신처가 된 모양이다. 

고라니를 바로 눈앞에서 보니 발자국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당장 예초기를 들고 옥수수밭 옆 둔덕 풀 잡기에 나섰다. 세시간 동안 예초기질을 하니 옷을 벗어 짜면 줄줄 흐를 정도로 온몸은 땀에 흠뻑 젖고 예초기는 시동이 꺼져 버렸다. 그리곤 안 켜진다.

고장나면 장수엔 마땅히 고칠 곳이 없어 전주까지 가야 하는데, 왜 시동이 안 걸릴까 예초기와 씨름하다 포기! 해가 지고 있다. 뱀을 보며 시작한 하루, 고라니 때문에 광분해서 풀을 베느라 다 가버렸다.

샤워를 하고 저녁 밥상을 차렸다. 반찬은 오늘 수확한 풋고추와 쌈배추, 열무김치, 토마토 오이 샐러드다. 모든 게 우리가 키운 농산물로 차린 밥상이다. 벌써 몇 달 째 이어지고 있는 왕도 부럽지 않은 호사스런 푸른밥상 덕에 오늘 써버린 힘을 다시 듬뿍 채워 넣는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룻밤 자고 나면 내일은 다시 예초기가 정상 작동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