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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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09년

비 예보에 농촌이 들썩이던 ‘고구마 데이’

백화골 2009. 5. 17. 22:57

금요일 저녁부터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주변이 들썩였다. 그것도 금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일요일까지 비가 2박 3일간 내린다는 예보였다. 5월15일이면 고구마를 심기에 가장 좋은 날짜. 우리도 긴장해서 금요일 저녁에 고구마를 심기 위해 회원제 발송을 서둘렀다.

목요일 저녁에 미리 만들어놓은 밭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고구마는 물이 많이 들어가야 해서 구멍을 크게 뚫었다. 칼로 하나하나 구멍을 뚫으면서 마음 속으로 올해는 고구마 농사가 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작년엔 100평 조금 넘게 고구마를 심었다. 힘들게 심고 풀을 잡고 거두었지만 땅 속에 굼벵이들이 득실대고 오랜 가뭄으로 색이 바라면서 대부분의 고구마를 출하하지 못했다. 고구마 농사가 비교적 친환경 재배가 쉬운 편에 속하지만, 토양 살충제로 땅을 소독하고 제초제로 풀을 잡는 관행농에 비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올해는 굼벵이 수를 줄이기 위해 석회를 뿌렸다. 석회는 유기농자재로 산성화된 땅을 정화하고 굼벵이나 기타 해충을 줄이는 역할도 한다.

금요일 새벽, 다른 날보다 더 먼저 일어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을 했다. 오후 4시30분 정도가 되니 일이 끝난다. 아내는 마무리 포장 작업을 하고, 먼저 내려가 고구마를 심기 시작했다. 5시가 조금 넘으니 밤 12시부터 내린다는 비가 벌써부터 내리기 시작한다. 작년에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비를 맞으며 고구마를 심느라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올해는 이래저래 땅 속 해충에 대한 대비도 하고 풀도 잘 잡아줄 계획을 세워 평수를 반으로 줄였다. 땅을 무조건 늘리기보다는 효율성을 높이는 게 중요한 일이다.

6시 정도에 아내가 합류하고 계속 고구마를 심어나갔다. 다행히 큰 비가 아니라 살며시 내리는 가랑비라 비 맞으며 심을 만하였다. 7시 30분이 넘어가자 어둑어둑해지더니 이내 앞이 안 보인다. 트럭 시동을 걸고 헤트라이트를 켰다. 일이 끝난 시간은 9시. 마침 비가 더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뜨거운 물로 씻으니 몸도 마음도 가볍기 짝이 없다. 비 소리가 아름답고 행복하게 들린다.

토요일 오전에 밭에 나가보니 고구마들이 너무도 기세 좋게 살아 있다. 비오는 날 심었어도 다음날 쨍쨍 쬐면 고구마가 잘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다행히 비가 계속 내린다. 할 일 끝내고 하루종일 비가 내리니 간만의 공휴일이다. 전주에 갔다. 처형네가 작년에 전주로 이사를 와서 종종 간다. 

주변에 사는 이웃도 우리 가족회원이 되어 마침 농산물 배달도 같이 했다. 극장에 가서 영화도 봤다. ‘김씨 표류기’. 영화가 좋다. 특히 주인공이 한강 밤섬에 표류해서 살기 위해, 희망을 찾기 위해 몰입하는 일이 농사라는 설정이 재밌다. 자살을 하려다 무인도에 표류해 농사로 희망을 찾고, 또다른 외톨이와 소통하며 더 나은 삶을 꿈꾼다는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장수로 돌아오는 내내 계속 비가 내려주니 더욱 좋다. 금요일에 보낸 회원들한테서 잘 받았다는 연락이 온다.

비는 오늘 오후까지 계속 내렸다. 오후 2시 넘어 비가 그친다. 오늘은 얼마 전에 농기계에 손가락을 다친 박용주 형님의 민채네 사과밭에 일을 도우러 갔다. 이웃이 어려움에 처하면 돕고 사는 게 시골 인정인지라, 농민회 회원들이며 마을 이웃들이 많이 모였다. 용주 형님은 장수군에 귀농한 많은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귀농 선배다. 작년까지 장수군 농민회 계남면 지회장을 맡았고, 무농약으로 사과를 키우는 친환경 농사꾼이기도 하다. 우리도 귀농 초기부터 큰 도움을 받았는지라, 용주 형님의 사고 소식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오늘의 작업은 용주형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못하고 있는 사과 나무 밑 풀베기. 예초기를 들고 많은 사람들이 3천평 밭에 달려드니 진도가 팍팍 나간다. 다친 형님의 쾌차를 빌며 바쁜 와중에도 모여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모인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담은 예초기 소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가 없다. 2시30분부터 시작된 작업이 해 넘어가고 8시 조금 넘어서야 끝났다.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길, 병원에 있는 용주 형님한테 일 도와줘서 고맙다는 전화가 온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중반에 접어든 요즘, 우리 농촌살이는 참 행복하다. 재밌는 일거리가 있고, 우리 농산물을 함께 나누는 많은 도시 가족이 있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씨, 자연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누가 지금 꿈이 뭐예요 라고 묻는 다면, “지금처럼 사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2009년 5월, 이 행복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