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안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아저씨 한 분이 다가오더니 우유 한 팩을 불쑥 내밉니다.
"이거 잡숴봐요."
사근사근한 서울 사람에 비하면 겉으론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전북 스타일에 그새 저도 꽤 익숙해져 있는 터라 나름대로 얼른 상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 우유 배달하시는...?"
"아니, 뭐, 그냥, 한 번 이 일을 좀 해볼까 해서..."
우유 배달 홍보를 하시려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해지려 하는데, 마침 윗밭에서 일하고 내려오던 남편이 아저씨와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역시 공짜 우유 한 팩을 받아 마셔가면서요.
아저씨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본인은 농사짓고 부인이 우유배달 영업을 하는데, 주말에 홍보나 좀 도와주려고 마을 몇 곳을 돌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한 번 올라와보신 거고요.
아저씨 말을 듣자마자 남편과 나는 화들짝 놀라 외쳤습니다.
"그럼 이거 신청하면 정말 우유 배달 해주시는 거예요?"
왜 놀랐냐고요?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우리 마을은 지금까지 배달업계의 차가운(?) 외면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도시에서 살 땐 배달 서비스를 참 당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곳에서 살다보니 집까지 뭔가 배달해주는 것이 사실 얼마나 큰 ‘서비스'인지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답니다.
신문 배달은 당연히 안 되고, 통닭 배달 피자 배달 불가. 읍내 중국집에서도 바쁜 점심시간엔 배달 불가(그 외의 시간에도 대부분 불가). 택배를 시키면 업체에 따라선 며칠씩 묵혔다가 배달해주기 일쑤.
그런데 우유 배달을 '판촉'까지 하러 일부러 올라오셨다니 감격스러울 밖에요. 하지만 역시나. 아저씨는 좀 난감해하시면서 한두 집만 시켜선 어렵고 적어도 대여섯 집 이상 묶어서 신청해야 가능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면 그렇지.
우유 잘 먹었다고, 정말 맛있다고 말씀드리자 얼굴이 환해지며 "그럼, 내가 Y 우유 말고 다른 우유는 맛없어서 못 먹어." 하시며 홍보지 한 장 안 주고 그냥 내려가셨습니다. 아무래도 우유 홍보보다는 젊은 사람들 모여 사는 마을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 올라오셨나봐요. 아무튼 덕분에 일하다 한창 목마를 때 우유 한 팩씩 잘 얻어먹었습니다.
아무리 대여섯 집 묶어서 신청한다 해도 이런 날엔 배달 신청 받은 걸 후회하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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