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일이 있어 전주에 다녀오던 길입니다.
오후 늦게 출발했던 길이라, 볼일 마치고 장수로 돌아오려니 벌써 깜깜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전주 시내를 채 빠져나오기 전,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췄습니다. 우리 차 앞에는 빈 택시 한 대가 신호대기하고 서 있었고요.
택시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실내등을 켭니다. 깜깜한 저녁이라 실내등을 켠 차 안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나이 지긋해 보이시는 기사분이 돋보기 안경을 코끝에 걸치더니 무슨 종이쪽 하나를 실내등 밑에 바짝 갖다 대고 열심히 들여다봅니다. 아, 어디서 많이 봤던 더 종이쪽! 다름 아닌 로또 영수증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라디오에서 이 주의 로또 당첨번호를 발표했었나 봅니다. 로또 번호를 맞춰보는 아저씨의 표정이 진지함을 넘어 너무나 엄숙해 보여, 신호가 이미 초록으로 바뀌었지만 차마 뒤에서 클랙션을 빵빵거릴 수 없었습니다.
로또 같이 허황된 행운을 꿈꾼다고 그 누가 아저씨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제대로 쉴 틈도 없이 열심히 일하지만 경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손님은 줄고, 아이들 교육비는 걷잡을 수 없이 뛰어오르고, 뾰족한 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로또 당첨에 엄청난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니고... 뻔하디 뻔한 아저씨의, 그리고 우리네 삶이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짧은 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실망한 것도 아닌 덤덤한 표정으로 아저씨는 뒤늦게야 바뀐 신호를 따라 서둘러 달려 나가고, 우리는 왠지 알싸한 기분으로 장수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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