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박정선, 조계환/울주군 두서면 내와1길3/유기농인증번호 : 07100003/연락처 : 010-2336-0748

농부의 하루/2009년 89

엄숙한 순간

볼일이 있어 전주에 다녀오던 길입니다. 오후 늦게 출발했던 길이라, 볼일 마치고 장수로 돌아오려니 벌써 깜깜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전주 시내를 채 빠져나오기 전,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췄습니다. 우리 차 앞에는 빈 택시 한 대가 신호대기하고 서 있었고요. 택시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실내등을 켭니다. 깜깜한 저녁이라 실내등을 켠 차 안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나이 지긋해 보이시는 기사분이 돋보기 안경을 코끝에 걸치더니 무슨 종이쪽 하나를 실내등 밑에 바짝 갖다 대고 열심히 들여다봅니다. 아, 어디서 많이 봤던 더 종이쪽! 다름 아닌 로또 영수증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라디오에서 이 주의 로또 당첨번호를 발표했었나 봅니다. 로또 번호를 맞춰보는 아저씨의 표정이 진지함을 넘어 너무나 엄숙해 보여..

영화 <레몬트리>

우리 집에는 TV가 없지만, 몇몇 분들이 상상하듯 고요하고 적막한 시골 저녁의 밤 풍경이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인터넷이 있기 때문이죠. 일하고 들어와 씻고 저녁 먹고 나면, 자기 전까지 주로 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가끔 화제의 드라마나 영화를 다운받아 볼 때도 있고요. 영화 도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영화인데, 국경 지역에 사는 팔레스타인 여인의 레몬 농장 근처로 이스라엘 국방장관 부부가 갑자기 이사 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네, 다음부터는 당연히 짐작할 만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군인들의 초소와 철조망이 세워지고, 레몬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통지문이 날아들고, 팔레스타인 여인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되고... 이러한 과정들이 도식적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살아 ..

토끼로 시작해 조개로 끝난 따뜻한 봄날 하루

하루종일 봄 햇살이 따뜻하게 비췄다. 아침이면 영하 7, 8도의 추운 날씨 탓에 일하러 나가기도 싫던 최근 며칠과 달랐다. 영상의 기온에 화창한 봄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일 좀 많이 할 수 있겠네 하고 마당에 나와 보니, 뭔가 화들짝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뜻밖에도 하얀 토끼다. 작년에 우리 하우스 안에 산토끼가 내려와 양상추를 마구 먹어치우던 생각이 나서, 토끼를 보니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고 귀엽기는 하지만 고라니도, 토끼도 농촌에서는 밭을 망쳐놓는 불청객일 뿐이다. 토끼가 쉽게 잡힐 리가 없다. 마구 도망간다. 마침 우리집 주변을 지나던 윗집 용민 아빠를 불러 토끼를 쫓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고... 아랫집 마당으로 도망갔던 토끼가 다시 우리집 마당으로 뛰어 들어온다. 툇마루 밑으..

녹차의 삼단 변신

낮에 손님이 찾아와 녹차를 대접했습니다. 재작년 이웃이 일본 농업 연수를 다녀오면서 사다준 유기농 녹차인데, 아껴가며 마셨더니 아직도 봉지에 반절이나 남아 있는 것을 오랜만에 덜어내 우렸지요. 손님이 가고 난 뒤 거름망에 남아있는 찻잎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운 생각이 들어 찻물을 한 번 더 우려내 저녁 세수를 해보았습니다. 비누를 쓰지 않았는데도 뽀송뽀송한 것이 개운하고, 로션을 바르지 않아도 피부가 당기지 않는 것이 참 좋더군요. 아, 이래서 사람들이 녹차 녹차 하는구나 알겠더라고요. 이젠 설거지 해야지 하고 거름망을 개수대에 넣으려는데, 파릇파릇 싱싱하게 불어난 찻잎을 버리기가 여전히 아깝습니다. 예전에 인사동 전통찻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언니에게 놀러가서 가끔씩 얻어먹던 녹차김밥이 생각나 녹찻잎으로 ..

잠깐 방심으로 하우스 망가뜨리다

올해도 2월 말 하우스 감자를 심는 것으로 한 해 농사를 시작했다. 점적 호스 등 하우스 이곳저곳을 정리하고 퇴비를 듬뿍 넣은 뒤 트랙터를 끌고 들어가 밭을 갈았다. 이제 올해로 5년차에 접어든 만큼, 트랙터 운전은 자신이 있었다. 적응하던 첫 해 이후엔 거의 실수를 한 적이 없기에 약간 속도까지 내면서 자신만만하게 하우스 안으로 트랙터를 몰고 들어갔다. 그런데 아뿔사! 욕심내어 하우스 가장자리에 너무 바짝 붙여서 로타리질을 하다가 그만 트랙터가 하우스 파이프와 파이프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앞으로 가면 앞쪽 파이프가 찌그러지고, 뒤로 가면 뒤쪽 파이프가 상하고... 온몸에 땀이 쫙쫙 흐르고, 트랙터는 점점 땅속 깊숙이 박혀 들어간다. 결국 하우스 파이프 여섯 개가 완전히 찌그러졌다. 겨우겨우 빠져 나..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집’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올해도 역시 눈이 먼저 마중을 나왔다. 하염없이 펑펑 잘도 내린다. 몇 년 째 겨울 내 동파 방지를 위해 보일러와 배수관에 물을 빼고 다시 봄에 넣는 일을 반복해서인지, 2박3일 걸리던 일이 단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일이 너무 쉽게 끝나 스스로 어안이 벙벙할 정도. 보일러를 다시 돌리고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나니 이렇게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하다. 작년 여름에 5톤 트럭 한 차 분량을 사서 열심히 잘라 놓은 참나무 장작 덕분에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맹추위도 전혀 두렵지가 않다. 먹을 양식이 없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작년 가을에 심었다가 잘 안 자라서 그냥 두고 갔던 시금치들이 겨울 추위를 견디고 부쩍 자라있다. 몇 포기 뽑아서 먹으니..

다음 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이사했습니다

3년 간 둥지를 틀었던 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manrak)에서 티스토리(http://naturefarm.tistory.com)로 이사했습니다.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 이사한 것이지만 실제만큼 어려운 일이더군요. 오랫동안 시골 생활을 하다보니 인터넷 활용법도 잊어버리고, 새로운 운용 틀에도 익숙지 않아서 며칠을 고생고생 한 끝에 티스토리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2009년 3월5일 이전 날짜로 올려진 글들은 모두 다음 블로그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다음에서 티스토리로 이사한 이유는 운용 틀이나 방식이 티스토리 불로그가 훨씬 더 열려 있어서입니다. 또 더 많은 분들과 농사 이야기와 시골 살이에 대한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서이기도 하구요. 올해는 농..

내년엔 시베리아로!

정기휴가를 끝내고 무사히 백화골로 다시 돌아왔어요. 이번에 여행한 곳은 터키, 불가리아, 그리고 제주도였답니다. 무섭게 뛴 환율 덕에 하루 세 끼 빵만 뜯어 먹으며 다녔지만, 여러 가지 보고 느낀 점 많은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작년, 재작년엔 주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여행했기 때문에, 매서운 늦겨울 추위가 남아있는 장수로 갑자기 돌아왔을 땐 정말 오돌오돌 떨며 고생했었지요. 올해는? 터키의 겨울은 거의 한국 겨울만큼 춥습니다. 불가리아는 영하 20도는 되어야 “아, 오늘은 좀 춥네” 할 정도지요. 제주는 기온 자체는 높았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엄청난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는 한없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아무튼 그래서 올해는 추위 적응하느라 고생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아예 내년엔 시베리아에 다녀올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