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농부의 겨울 여행2
"추운 스웨덴 겨울 여행, 따뜻하고 밝은 카탈루니아, 대만"
스톡홀름에 도착한 첫 느낌은 ‘캄캄하고 춥다’였습니다. 날씨가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 표정도 대체로 어두웠습니다. 이 느낌은 떠나는 날까지도 계속되었는데, 하필 추운 겨울에 스웨덴에 가다니, 겨울에만 여행할 수 있다는 게 조금 아쉬웠어요.
이민 간 가족을 찾아 스톡홀름으로
스웨덴에는 40년 전쯤 한국에서 이민 간 큰어머님 식구들이 살고 있습니다. 40년 전 독일 간호사로 일하러 가셨던 큰어머님이 이후 스웨덴으로 옮겨 가신 뒤에 큰아버지와 사촌 누나들, 형들을 초대해서 정착하셨거든요.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 남편과 자식들은 한국에 두고 멀고 먼 이 낯선 나라에 와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큰어머니의 이민 정착기를 듣자니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어요. 다행히 누나들도 형들도 다들 스웨덴 사회에 잘 자리 잡고 행복하게 살고 계셨습니다.
스웨덴 집에 가보니 집집마다 이런 초들이 가득하더군요. 성탄절과 연말연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밝은 조명 대신 촛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스톡홀름의 겨울밤은 정말 길었는데요, 저희가 여행했던 1월 초에는 보통 아침 9시 넘어서 해가 뜨고 오후 2시 30분부터 어두워져서 3시 조금 넘으면 캄캄해지더라고요.
거리 풍경도 비슷해요, 낮에도 거의 하루 종일 해를 보기 힘든 흐린 날씨에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기온 자체는 엄청 낮은 게 아닌데도 해를 보지 못하니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사실 한국에서 스웨덴 하면 엄청 행복하게 사는 복지국가 이미지잖아요. 하지만 현지인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최근 우파들이 힘을 가지면서 경제 민주화를 위해 필요한 부유세, 상속세도 없어지고,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증가, 치안 불안, 우울증 환자 증가, 원하는 때에 신속하게 치료 받기 어려운 의료시스템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물론 북유럽이 가지고 있는 좋은 시스템들도 많겠지만,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부풀려진 환상적인 이미지만 부각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유럽을 보며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게 아니라, ‘우리도 충분히 행복하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부모님께서 큰집을 따라 스웨덴으로 이민가지 않고 한국에서 계속 살수 있도록 해 주셔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은 많았어요. 내복에 옷을 몇 겹씩 껴입었는데도 너무 추워서 덜덜 떨면서 스톡홀름 거리를 구경했어요. 거리가 예쁘긴 했지만 햇볕이 그리웠어요. 스웨덴은 감자와 몇 가지 작물 외에는 거의 농사가 안 되어서, 사람들이 주로 먹는 음식도 감자에 고기, 그리고 독한 술을 많이 먹었고요, 시장에는 대부분 수입 농산물이 나와 있었어요.
스웨덴 밤 풍경. 추운 날씨에도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고 노는 사람들이 있네요.
사촌 누나가 최근에 구입했다는 여름 별장과 보트에요. 스웨덴 사람들은 6주 정도 유급 휴가가 있는데, 보통 여름에 이 휴가를 여름 별장에서 보트 타면서 지낸다고 하네요. 워낙에 날씨가 나빠서 반짝 좋아지는 여름동안 미친 듯이 야외 활동을 한다고 해요.
스웨덴에서 연초에 1주일 정도 있었는데, 사촌 누나네 집에 머물며 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어요. 최근 갓 결혼한 조카들도 만나고 싶었지만, 어머니 나라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인지 한국에서 온 삼촌 부부에게 별 관심이 없더라고요. 제대로 이야기 한번 나눠보지 못해 아쉬웠어요. 누나들이 이민갈 때만 해도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으니, 한국에 대한 관심이나 자부심 같은 건 없었을 것 같아요. 이해가 되더라고요.
추운 겨울 나라 스웨덴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카탈루니아로 향했습니다.
기구를 타고 독립 염원으로 가득한 카탈루니아를 내려다보다
늦은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강렬한 햇빛으로 가득한 바르셀로나 공항. 새삼스레 해의 소중함을 느끼며 감탄하고 있는데, 멀리서 조안이 여자 친구 미레야와 함께 나타났어요. 2014년 백화골에 찾아와 한 달 동안 머물렀던 조안. 5년 만에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갑던지요. 뜨거운 포응을 하고 조안의 고향인 카탈루니아 시골 마을 올롯으로 향했습니다.
2014년 백화골에서 함께 한 사진이에요. 당시 조안은 형 마크, 형수 소냐와 함께 백화골에서 한 달 머물렀는데 정말 매력 넘치는 친구였어요. 함께 지낸 기간은 한 달밖에 안 됐지만 마치 친동생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였어요.
조안의 여자친구인 미레야는 처음 만났는데, 임신 5개월째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바람둥이 조안이 아빠가 되다니! 미레야를 만나서 집도 사고, 아이들도 낳고, 이제 고향 마을에 완전히 정착할 거라고 하더군요. 조안이 내일 새벽에 일찌감치 버섯 농장 견학을 시켜줄 거라고 해서 얼른 잠자리에 들었어요.
다음 날 정말로 해가 뜨기도 전에 새벽같이 일어나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습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기에 버섯농장이 이런 산 속에 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드디어 도착한 버섯농장.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은 농장이 아니라 열기구 타는 곳이었어요. 장난꾸러미 조안이 깜짝 이벤트로 우리들 모르게 열기구 투어를 예약해둔 것이었답니다. 순간 어찌나 난감하던지. 사실 저는 고소공포증이 심해서 높은데 올라가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거든요.
조안과 마크, 소냐가 각자 돈을 모아서 오랜만에 만나는 우리를 위한 선물로 비싼 열기구 투어를 예약해준 것인데, 고소공포증 때문에 못한다고 할 수도 없고... 눈 딱 감고 어떻게든 견뎌보자 하고서 벌벌 떨며 열기구 바구니에 올랐습니다.
잠깐만 참자 생각했는데, 풍선은 끝없이 끝없이 올라가기만 했습니다. 하늘에서 해 뜨는 걸 보기 위해 아직 깜깜한 새벽에 시작한 것이었고요. 드디어 산등성이 위로 해가 뜨고 남들이 다 멋진 풍경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혼자 겁에 질려 있었는데, 열기구 가이드가 모두에게 잔을 나누어주더니 샴페인을 따라주었습니다. 참 낭만적이었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탈루니아 벌룬 투어, 하늘 꼭대기에서 마시는 샴페인 한잔! 갑자기 내가 왜 고소공포증 따위에 괴로워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 즐겨보자’ 하고 마음을 바꾸니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었어요. 엄청나게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나니 공포증이 순간 없어진 거예요.
사실 저의 고소공포증은 2012년 첫 스페인 여행 때 17층 숙소에 머무르면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었는데요, 스페인에서 생긴 고소공포증이 스페인에서 사라진 셈이었어요. 열기구 비행을 즐기며 아름다운 카탈루니아의 산악 지대를 둘러보았어요.
열기구에서 내려오니 늘 웃음이 넘치는 쾌활한 조안 부모님께서 반겨주셨어요. 제가 고소공포증이 사라졌다고 하자 다들 너무 좋아하며 같이 지역의 전통 음식으로 차려진 점심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어요.
조안과 미레야 커플. 열심히 일하고 즐기고 재미있게 살고 있었어요.
조안과 미레야는 일을 하고 있어서 평일에는 저희끼리 주변 산책을 하고, 주말에 같이 한국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촬영지이기도 한 근처 도시 지로나로 향했어요. 바르셀로나에서 한참 떨어진 작은 도시였지만 드라마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줄서서 사진을 찍고 다니더라고요. 오래된 성과 교회, 거리 풍경이 참 예뻤어요.
갑자기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거리 곳곳에 걸린 노란 리본. 물어보니 카탈루니아 독립 운동을 하다 잡혀간 정치범들이 석방되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하네요. 카탈루니아는 스페인과 다른 민족이고 다른 언어를 쓰는 곳으로, 몇 백 년 동안 독립 운동을 계속 해오고 있는데 최근에 더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며 오랫동안 투쟁해온 때문인지,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굉장히 진보적이었어요. 독립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을 하지 말고 난민을 수용하자는 포스터, 환경 보호를 위해 채식을 하자는 전단지 등이 자주 눈에 띄였어요.
주말 시장의 모습이 마치 한국의 5일장 같았어요. 밝고 따뜻한 햇볕과 더 밝은 표정의 카탈루니아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행복해졌습니다.
오래된 성곽 풍경, 조안이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주었어요.
떠나기 전날 매주 월요일 시청 앞에서 열린다는 카탈루니아 독립을 위한 월요집회에 같이 참석했어요. 100명 정도의 시민들이 모였는데, 전통음악을 부르고 몇 사람이 정치 발언을 하고 차분하게 카탈루니아 국가를 부르며 마치더라구요. 아주 오랫동안 월요일마다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이 집회를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 마치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 같아서 마음이 아프고 짠했어요.
화창하고 밝은 날씨, 활기찬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 카탈루니아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참 즐거웠습니다. 아직은 가난하지만 이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어 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조안과 미레야의 밝은 기운도 좋았어요. 조안 가족의 행복과 카탈루니아의 독립을 기원하며 다음 여행지인 대만으로 향했습니다.
쓰레기를 재활용하고 세계적인 구호 활동을 펼치는 대만 자재공덕회, 아름다운 펑후섬
대만은 저희가 겨울마다 여행했던 나라들 중 제일 좋아하는 나라에요. 합리적인 사회 시스템과 더불어 사람들의 여유로운 삶의 태도가 참 매력적인 나라이지요. 이번이 세 번째 대만 방문이었는데요,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는 대만의 유명한 불교 환경 단체인 자재공덕회를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화련시에서 자재공덕회를 찾아가니 나이가 80이 넘으신 자원봉사자께서 영어로 열심히 자재공덕회의 역사를 설명해주십니다.
자재공덕회는 비구니 스님인 증엄스님이 만든 대만의 불교단체입니다. 환경 보호와 구호활동, 교육사업, 의료 사업 등을 하며 회원이 천만명이 넘는 큰 단체이지요. 한국의 정토회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합니다. 이 사진이 바로 재활용 쓰레기를 봉사자들이 분리해서 판매해 구호 자금을 마련하는 모습입니다. 일회용품을 많이 이용하는 대만에서 이런 운동은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특히 동물을 키워 고기를 먹는 육식문화가 환경을 해친다는 것을 자각하고 채식 운동을 펼쳐서 대만의 채식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자재공덕회는 전 세계 곳곳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 다양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에도 여러 차례 봉사자들이 방문했다고 하네요. 역사를 쭉 정리해놓은 기념관을 돌아보니 참 곳곳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더라고요.
회원들이 한 푼 두 푼 구호자금을 모으는 데 사용한 대나무 저금통.
자재공덕회 역사를 게임으로까지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구호활동, 환경 보호 운동을 설명해주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너무나 친절하고 따뜻했던 안내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펑후섬으로 갔습니다. 대만에서 제일 오래된 마을이 있고,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펑후에서 이번 여행 마지막 일정을 즐겼습니다.
펑후에서 유명한 오징어 국수, 신선한 맛이 일품이었어요.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풍경
표정이 밝고 예쁜 대만 사람들
저희가 펑후섬에 있던 시기가 1월 말이었는데, 이 때부터 막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사이에 사람들이 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 분위기가 싹 달라지더라고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 말까지도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고 전세계로 더 퍼지고 있어서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대만에서 마지막 날 아침,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전형적인 대만식 아침 식사를 먹었습니다. 1985년부터 문을 열었다는 식당의 주인 부부는 나이가 드셨지만 여전히 활기가 넘치고 친절했습니다. 오래된 식당이었지만 구석구석 깨끗하게 정리정돈 되어 있었고요. 기름에 튀긴 중국식 빵과 두유로 아침을 먹는데, ‘아, 이번 여행이 끝나는구나’ 하며 아쉬운 마음이 밀려왔어요. 그리고 노부부의 모습을 보며 얼른 농사 일 시작하고 싶은 힘도 솟구쳤고요. 좋은 여행은 큰 힘을 주네요. 저희에게 아낌없이 친절함을 나누어준 제시카 가족, 스웨덴 친척들, 조안 가족, 자재공덕회 분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올 한해도 힘차게 농사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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