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농부의 겨울 여행1
“성탄절 프랑스 소도시 클라멩페랑, 나무 코끼리의 낭트”
2004년 서울에서 살며 귀농을 계획한 가장 큰 이유는 농사와 여행을 함께 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던 야근과 부조리한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 농사철에는 환경을 보호하는 유기농사를 짓고, 겨울이면 세계를 여행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귀농 이후 좋은 선배 농부들을 많이 만나서 농사 기술을 배우고, 제철꾸러미라는 농사 방식을 만들어 농사만으로 자립할 수 있었습니다. 농사철에는 자급자족하며 생활비를 절약하여 적은 비용으로 겨울에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지난 겨울 여행은 백화골에 찾아왔었던 외국인 봉사자 친구들의 집과 친척집을 방문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친구와 친척 집만 방문하는 일정이라, 비록 물가 비싼 유럽 지역이었지만 거의 경비가 들어갈 일이 없어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 따뜻한 정이 넘치는 제시카 가족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예약하다보니 파리 공항에 새벽 12시 무렵에 도착했습니다. 파리는 그냥 지나치고, 새벽 버스를 타고 백화골에 여러 차례 방문했었던 제시카네 가족이 사는 프랑스 중부 도시 클라멩페랑으로 향했습니다.
밤새 버스에서 뒤척이며 도착한 클라멩페랑의 버스터미널. 제시카와 동생 카라, 아버지 로버트, 고모 메기까지 가족이 함께 마중을 나와 주었습니다. 반가운 포옹이 이어진 뒤 차를 타고 제시카 집에 도착하자마다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영해주네요. 건배하며 한잔 마시고 나니 진짜 여행이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빈 방이 많은 메기 집에서 머물렀는데, 가족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오래된 집이였어요. 오래된 사진과 골동품 등 시간의 흔적이 느껴져 마치 작은 박물관에 있는 듯 한 느낌이었습니다.
6년 전에 백화골에 방문했던 제시카 자매들 사진이에요. 이번에 프랑스에 가서 다 같이 만나 성탄절 파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메기는 한국 배우 현빈의 엄청난 팬이기도 했어요. 70대 할머니인데 현빈이 나오는 드라마는 다 보았고, 한국 여행도 많이 했어요. 메기의 집안 곳곳은 현빈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각종 메모지나 우산 같은 물건들도 다 현빈 팬클럽 물품 일색이라 너무 재미있었어요.
클라멩페랑이란 도시는 미쉐린 타이어 본사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예전에는 유명한 포도주 생산지였다고 해요. 그래서 집집마다 포도주 저장 창고가 있고, 많은 농부들이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 19세기 말에 포도나무에 기생하는 필록세라(Phylloxera vastatrix)라는 진딧물 같은 벌레가 미국에서 들어와 유럽의 포도밭을 거의 전멸시켰다고 하네요. 이 때 클라멩페랑의 포도밭도 거의 전멸하여, 지금은 그냥 옛날 포도주 저장 창고들만 남아 있었어요.
오래된 포도주 저장창고. 예전에 포도주 만들던 시절에는 포도 농사로 활기가 넘치던 지역이었다고 하네요.
화가인 제시카 어머니가 그린 그림. 동네 곳곳에 제시카 어머니가 그린 그림이 있었어요. 빵집에도 교회에도.
제시카 어머니의 집에 깜짝 방문해 재미있는 티타임을 가졌어요.
12월이라 성탄절 준비로 분주한 시내에 함께 나가 보았어요.
우연히 들른 성당에서 아이들이 함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는 공연을 관람했어요.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참 감동적이었어요.
삼시세끼 치즈가 빠지지 않았어요. 치즈가 주식인 나라에서 먹으니 정말 맛있었어요.
메기네 식탁, 약간의 샐러드와 햄, 치즈, 포도주. 한국 사람처럼 한 번에 폭음을 안 할 뿐이지, 일상적으로 거의 매일 술이 빠지지 않는 문화인지라, 생각보다 사람들의 음주량이 상당했어요.
트리 앞에서 온 가족과 함께
열흘간 방을 내어준 고마운 제시카 고모 메기
2014년 여름 사진이에요. 제시카가 백화골에서 지내던 시절 우연히 길을 가다 프랑스 국기를 달고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년의 아저씨 피에르를 만난 적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마침 제시카랑 같은 고향 동네인 클라멩페랑 사람이어서, 점심을 같이 먹으며 재미나게 이야기꽃을 피웠었지요.
5년 6개월의 시간이 흐른 지금. 혹시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연락해봤더니, 너무나 반가워하면서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었어요. 한국에서 우연히 만나 정을 나누었던 기억이 정말 고마웠다면서, 크리스마스 정찬 프랑스 요리를 부부가 직접 요리해 주셨어요. 역시 포도주도 많이 마시고, 마무리로 자기의 보물이라며 30년 된 꼬냑까지 주시더라구요.
제시카 가족과 오래된 성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공무원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었어요. 프랑스어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현지인들과 함께 하는 투어라 재미있었어요.
제시카 가족과 열흘 정도 함께 지냈는데, 마침 성탄절 기간이어서 매일같이 유쾌하게 보냈답니다. 클라멩페랑은 농촌과 소도시가 함께 있는 매력적인 도시였어요.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오래된 도시 모습과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도 멋스러웠어요.
매일 프랑스 가정식 식사를 함께 했는데, 역시 고기가 주식이었어요. 제시카가 자신이 일생동안 채소를 가장 많이 먹었던 때가 바로 백화골에 머물던 때라고 하더라구요.
한국의 음식 문화는 본래 채식에 가까웠지요. 서구 식문화가 들어오면서 고기를 많이 먹게 되었지만요. 최근 한국에 유럽에서 들어온 채식문화가 유행하는 모습은 조금 안타까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채식 식당에서는 복잡한 외국 이름에, 외국산 식재료를 기반으로 한 낯선 서양 채식 메뉴를 아주 비싼 가격에 파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 음식 문화와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보면 굳이 멀리서 들어온 것 말고, 자연스럽고 건강한 한국의 채식문화를 접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열흘은 금세 지나갔어요. 한국 사람들의 정 만큼이나 따뜻한 ‘프랑스의 정’을 느끼게 해준 제시카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었어요. 제시카 가족의 배웅을 뒤로 하고, 또 다른 프랑스 친구인 크리스를 만나러 서쪽 도시 낭트로 향했습니다.
나무 코끼리가 살린 도시 낭트
크리스는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프랑스 친구에요. 백화골에도 여러 번 방문해서 함께 농사일을 했어요. 한국 문화와 음식을 사랑해서 오랫동안 한국을 여행하던 크리스는 결국 한국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지금은 고향 낭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2015년 마늘 수확 후 크리스와 함께
낭트는 이 나무 코끼리 때문에 요즘 인기를 끄는 관광지가 된 도시라네요. 거대한 나무 코끼리 안에 기계 작동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을 태우고 걷기도 하고, 눈을 깜빡이며 소리도 내고, 귀도 팔랑거리고, 가끔 코에서 물을 뿜어내기도 해요.
낭트에서는 1주일 정도 머물면서 크리스와 지냈습니다. 한국 여자와 결혼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크리스는 목공예를 배우는 학교를 다니며 목수로서 이것저것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프랑스 유기농 농부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낭트 근처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장에 연락해주어 함께 방문했습니다.
두 사람이 운영하는 농장이었는데요, 백화골과 굉장히 비슷한 방식으로 농사짓고 제철꾸러미와 비슷한 방식으로 판매도 하고 있더라고요. 농사만으로 자립해 생활을 이어간다는 것도 백화골과 비슷했구요.
부직포로 멀칭하는 것이라든지, 채소 키우는 방법 등을 설명해주었어요. 한국의 유기농법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기후가 변화면서 세계 어디에서든 비가림 비닐하우스가 아니면 유기농사 짓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어요.
농사지으며 직접 지은 집이라는데, 소박하지만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멋진 집이었어요.
저희와 다른 점은 농장이 도시와 가까워서 농장에서 직접 주말에 판매를 한다고 하네요. 단골 고객들이 많아서 꽤나 인기가 있다고 해요.
오후에 도착해서 농장을 둘러보고 차 한 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가 졌습니다. 한 해 동안 기후 변화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갈수록 유기농사 짓기가 어렵다든지, 유기농 농사지으면 돈은 많이 못 벌지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 어쩜 이렇게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인데도 비슷한 생각을 할까 재밌었습니다. 서로 강한 유대감을 나누며 짧은 만남을 뒤로 했습니다.
채식주의자인 크리스와 연말 연시를 보내며 낭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공 학교를 다니느라 바쁜 와중에서도 저희를 반갑게 맞이해준 크리스에게도 정말 고마운 마음입니다. 워낙에 착하고 좋은 사람인 크리스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길 기원했습니다. 낭트에서 파리 공항으로 다시 나와 이번에는 두 번째 나라이자 친척들이 살고 있는 스웨덴으로 향했습니다.
'농부의 하루 > 2017년~2022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철꾸러미 발송, 한 달이 벌써 지났어요!” (4) | 2020.05.27 |
---|---|
백화골 농부의 겨울 여행2 "추운 스웨덴 겨울 여행, 따뜻하고 밝은 카탈루니아, 대만" (1) | 2020.03.26 |
2019년 백화골 유기농 제철꾸러미 마지막주 발송 (2) | 2019.11.17 |
태풍 지나가고 땅콩, 우엉 캐고 가을 농사 시작 (5) | 2019.09.25 |
채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다!(How can vegetables be this pretty!) (3) | 2019.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