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많이 바쁠 때 아니잖아. 놀다가 하룻밤 자고 가.”
“아뇨, 모종들 돌봐줘야 해서요...”
“어이구, 벌써 모종이 들어가나?”
해마다 2월이면 누군가와 이와 비슷한 맥락의 대화를 하게 됩니다. 밤마다 얼음이 꽝꽝 얼고 눈발도 종종 날리는 2월이기에 농사일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요. 하지만 다른 많은 농가들처럼 백화골에서도 2월이면 그 해의 첫 씨앗을 넣곤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단 씨앗이 들어간 뒤로는 어디 멀리 가지 못합니다. 어린 모종이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는 않은지, 목마르거나 어디 불편하진 않은지 하루 종일 세심하게 돌봐줘야 하거든요.
고추, 가지, 봄배추, 브로콜리, 양배추, 대파, 토마토, 피망, 파프리카.
2월 중순 무렵 씨앗을 넣은 올해의 첫 주자들입니다. 씨앗을 먼저 접시에 담아 따뜻한 집안에 두고 수시로 분무기로 물을 뿌려가며 촉을 틔웁니다. 이삼일 쯤 지나 딱딱했던 씨앗이 통통해지면서 살짝 살짝 하얀 발들을 내밀기 시작하면, 얼른 모종 하우스로 옮겨 상토를 담은 트레이에 하나하나 심어줍니다. 모종 하우스 안에 또 하나의 작은 하우스를 설치하고 바닥에 열선을 설치합니다. 씨앗을 담은 트레이를 가지런히 놓고 물을 흠뻑 준 뒤 비닐과 두꺼운 담요 두 장을 덮어줍니다. 이렇게 하면 영하 10도로 떨어지는 추운 밤에도 모종들은 20도의 터널 하우스 안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수줍게 내밀었던 발들이 점점 길어지면서 뿌리가 되고, 이윽고 초록빛 떡잎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이제 수시로 온도를 체크하는 나날이 시작됐습니다. 아침이면 담요와 비닐을 벗겨서 실컷 햇빛을 보게 해주고, 늦은 오후가 되면 다시 춥지 않도록 단단하게 여며 줍니다. 아직은 이렇게 작고 여린 잎이지만, 여름이면 사람 키만큼 자라 싱싱한 열매를 내놓을 녀석들. 해마다 거듭되는 작은 기적이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사람마다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농부가 봄을 기다리는 건 올해도 심고 가꿀 씨앗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몇 해 째 농부의 손으로 직접 받은 토종 씨앗이라면 더 좋겠지요.
백화골에서도 가능하면 토종 씨앗의 비중을 늘리기 위해 해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농사를 전문적으로 짓는 농가에선 전적으로 토종 씨앗에만 의존하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토종 씨앗이라고 어렵게 얻어왔는데 막상 심어보니 발아율이 너무 낮다거나, 수확량이나 상품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1년 농사인데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것이지요.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토종 씨앗의 비율을 높이고 널리 퍼져나가도록 하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봄을 기다리는 농부님들에게 백화골에서 채종한 유기농 토종 씨앗 중 가장 튼실하게 잘 자라는 고추 씨앗을 나눔 해드리고자 합니다. 토종 씨앗 보존사업을 하는 홍성 씨앗도서관에도 얼마 전 듬뿍 보내드렸는데요, 그러고도 씨앗이 조금 남았습니다. 한뼘 텃밭 농부라도 좋고, 옥상 화분 농부라도 좋습니다. 필요한 분들 누구에게나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토종 고추 종자는 ‘칠성초’라고 하고요, 몸집은 통통하고 껍질은 두꺼우며 살짝 매운 맛과 단 맛이 도는 야무진 고추입니다. 백화골에서 이미 몇 해째 유기농 재배로 씨를 받아 키우고 있는 녀석인데, 매년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발아도 아주 잘 되는 편이고요. 고추 전문 재배 농가라면 이미 고추 씨 넣는 시기가 지났지만, 소량 재배거나 텃밭 농사 하시는 분이라면 어차피 하우스 육묘는 어려울 테니까 날이 좀 더 풀린 뒤 심으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토종 고추 외에 들깨(깻잎)와 차조기(자소) 씨앗도 필요하시면 같이 보내드리겠습니다. 들깨와 차조기 역시 백화골에서 몇 해 째 계속 씨를 받아 재배하고 있는 유기농 씨앗입니다. 날 따뜻해진 뒤 밭에 직파해 심고 물만 잘 주면 별다른 보살핌 없이도 금세 쑥쑥 잘 자란답니다.
토종 씨앗 받고 싶은 분은 주소(우편번호도 꼭 써주세요)와 성함, 연락처, 어떤 씨앗을 받고 싶으신지, 어떤 용도로 활용하실 것인지를 비밀댓글로 남겨주세요. 신청하신 토종씨앗은 3월 15일까지 신청 받은 뒤 3월 16일 편지봉투에 씨앗을 담아 우편으로 일괄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토종 씨앗 나눔의 의미를 생각해 별도의 요금은 받지 않고 모든 분께 무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단, 한 분께 많은 양을 보내드릴 수는 없고요, 이왕이면 이 씨앗으로 올 한 해 농사 잘 지으신 뒤 씨앗을 받아 주위 분들께 또다시 나눔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곧 3월이네요. 유명한 시의 한 구절처럼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 백화골에선 이제 본격적인 농사일 시작입니다.
*****2017년 토종씨앗 나눔은 씨앗이 소진되어 마감되었습니다. 내년을 기약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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