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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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13년~2016년

백화골 농부들, 겨울 휴가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백화골 2013. 2. 12. 21:52

입춘 지나고 설까지 지났으니 이제 농부의 긴 겨울 휴가도 끝났습니다. 전통적으로 따지자면 농부의 공식 개학날(?)은 정월대보름이지만, 하우스 농사가 일반화된 요즘은 개학날도 덩달아 많이 빨라졌답니다. 저희 역시 휴가를 마치고 다시 밭으로 돌아왔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길기도 했고 짧기도 했던 지난 겨울. 저희는 낯선 나라로 여행도 하고, 재미있는 드라마랑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모든 날이 평화로운 휴일 같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완벽하게 재충전이 되어 이제 한해 농사 준비를 힘차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여행하는 농부’이자 ‘농사짓는 여행자’라고 생각할 만큼 저희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귀농한 이후 해마다 여행을 빼먹지 않았는데, 지난 겨울엔 이사 때문에 여행을 못해서 참 아쉬웠습니다. 이번 겨울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여행을 가리라고 몇 달 전부터 벼르고 별러왔던 터라, 재정적인 난관 등 현실적인 어려움들은 그냥 훌훌 잊어버리기로 하고서 짧게나마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우리에겐 많이 벅찬 유럽 물가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여행은 참 좋더군요.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든 일상이 낯설어지는 느낌! 바로 이거야, 싶을 정도로 여행이 주는 신선함은 모든 어려움들을 보상해주고도 남았답니다.

 

 

보수적인 유럽의 카톨릭과 자유로운 집시 문화, 아프리카 이슬람의 영향까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열린 문화와 맛있는 커피, 맥주, 하몽 등은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마치 먹고 놀기 위해 사는 것 같은 태평스런 사람들, 거리마다 멋진 노래를 들려준 거리의 악사들,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12월 초에 여행을 떠나 12월19일 아침에 20시간의 경유 비행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장수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시차 때문에 비틀비틀거리면서도 어쨌든 투표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물론 다음날 많이 낙심하긴 했지만 말이에요. 앞으로 5년간 한국의 농부로 살아가기 위해선, 아니 살아남기 위해선 각오를 더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12년 마지막 날 저녁. 서해의 을왕리 해변에서 근처에 사는 친구와 함께 한 해 마지막 석양을 보았습니다. 해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무슨 축제라도 펼쳐진 것 같았습니다. 귀농 후 처음 태풍으로 큰 타격을 받고 몸도 마음도 약해졌었던 2012년을 멋진 석양과 함께 떠나보냈습니다. “그래, 어쨌든 2012년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잖아.” 역시 한 해 동안 안 좋은 일이 많았다는 친구와 함께 조개구이에 소주를 마시며 2012년에게 담담히 잘 가란 인사를 해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우리를 맞아준 것은 눈이었습니다. 올 겨울 참 눈이 많이 내립니다. 차가 오르막길을 못 올라가서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집까지 걸어 올라간 날도 많았습니다. 쓸면 또 오고, 녹으면 또 오고... 유투브 패러디 영상 ‘레 밀리터리블’에 나오는 ‘끝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폐기물’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납니다. 오늘도 예보에도 없던 눈이 내리네요. 이런 기세라면 올해 비도 참 많이 내릴 것 같습니다. 밭 준비할 때 배수로도 확실히 파고 두둑도 높게 만들어야할 것 같아요.

 

 

조그만 시골 마을마다 꼭 하나씩 있는 게 바로 이런 슈퍼를 빙자한 술집들이지요. 사진은 저희가 사는 면 소재지 동네에서 매일 저녁마다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조그만 가게입니다. 눈이 좀 녹아서 다닐 만하면 농사짓는 주변 친구들, 형님들과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며 겨우내 잘 놀았습니다. 땅 파먹고 사는 농민들끼리는 확실히 뭔가 통하는 게 있습니다. 대대손손 ‘땅의 사람’들만의 멋진 풍류도 있고요. 물론 농한기 때 재충전은커녕 더 몸 축내지 않기 위해선 적절한 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산골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저희 집은 밤새도록 큰 소리로 떠들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벗들이 놀러오면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도 부르며 또 재미나는 겨울밤을 보냈습니다. 눈이 많이 내려 집에 갇히면 드라마나 영화, 책을 보며 지냈고요. 새로 지은 집이 단열이 잘 되고 남향이어서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에도 따뜻하게 보냈습니다. 이런 겨울, 하루하루가 휴일인 날들이 있어서 또 다음해 농사짓는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이제 쉴 만큼 쉬었습니다. 일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슬슬 한해 농사를 힘차게 시작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