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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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13년~2016년

작은 시골 마을의 소박한 대보름 잔치

백화골 2013. 2. 24. 22:37

대보름입니다. 하얀 달이 둥실둥실 제일 예쁘게 뜨는 날, 농부들에겐 이제부터 농사 시작이야라고 하늘이 말해주는 날입니다. 시골 내려와 보니 대보름은 마을 행사 중에 최고로 중요한 날입니다. 하도 작은 마을이라 몇 년 동안 대보름 행사가 없었는데, 저희가 이사 온 이후로 마을 어르신들이 젊은 사람도 왔고 하니 대보름 잔치를 다시 하자 해서 부활한 행사입니다.

 


이것저것 밭 만들고 농사 준비 하느라 신경을 못 썼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 상황을 보시고는 어느새 달집 태울 나무를 다 해 놓으셨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하우스 안에 남아있던 싱싱한 봄동 배추를 한 자루 해가지고 마을회관으로 내려갔습니다.

 

 

회관에 가보니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직접 붓글씨로 쓰신 대보름 소원지를 한 집 한 집 다 나누어주시네요. 저희 집에는 ‘가족 건강 및 만사형통’이라고 써주셨습니다. 올 겨울 읍내 서예 교실에 나가서 연습을 많이 하셨다더니 참 고마운 선물입니다.

 

 

막 대보름 저녁을 먹으려는데 계북면 부면장님이 맥주 한 박스를 가지고 어른들께 인사하러 오셨습니다. 바쁜 와중에 작은 마을까지 챙겨주시는 부면장님을 뵈니 기분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저녁 밥상. 들깨가루에 버무린 호박고지나물, 아주까리 나물, 무생채 등 정말 소박한 대보름 밥상입니다. 오곡밥은 손도 많이 갈뿐더러 이가 안 좋으신 어르신들 드시기에 부담스러워 오늘도 그냥 흰쌀밥입니다.

 


평소 어른들 보시는 기준으로는 깨작깨작 하면서 먹다가, 오늘은 낮에 삽질을 많이 해서 배가 고팠던 참이라 양푼 채 들고 먹었더니 할머니들이 너무나 좋아하시네요.  

 


밥을 다 먹고 난 뒤 달집을 만들어놓은 회관 근처 논자리로 올라갔습니다. 돼지 머리를 놓고 불붙일 준비는 하는데 80대 어르신 분들도 설레어 하시네요. 

 


산 위로 달이 찬찬히 떠오릅니다. 2013년의 대보름 달빛이 은은히 세상을 비춰줍니다.

 


불을 붙이고 나자 자연스레 풍물이 시작됩니다. 아주 신나는 시간. 불이 훨훨 잘 붙는 걸 보시더니 노래 한 자락씩 뽑아내시는데 말 그대로 예술입니다.

 

 

 

열다섯에 시집와 온갖 고생하며 육남매 낳아 기르신 할머니 한 분이 막걸리 한 잔 걸치시고 부르시는 ‘여자의 일생’. 그냥 듣고만 있어도 눈물이 나네요. 저희 카메라가 똑닥이여서 동영상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만..... 할머니에 이어 반장 할아버지가 장구를 치면서 신명나는 대보름 노래를 부르십니다.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열 명 남짓한 마을 사람들끼리 치른 소박한 대보름 잔치였지만, 다른 어떤 큰 마을 잔치도 부럽지 않을 만큼 넉넉하고 풍족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