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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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11년

빗속 꽃잔치

백화골 2011. 7. 12. 21:06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며칠째 주룩주룩 비만 쏟아지고 있는 날들입니다.

작년, 재작년, 재재작년... 들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역시 장마가 길고 길어지면서 평안했던 마음도 척척하게 가라앉습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하우스 안에서 풀을 매다가 ‘왜 하필이면 농사꾼이 돼가지고 날씨 따라 안달복달, 전전긍긍... 어휴...’ 이런 생각까지 스쳐지나갑니다.

물론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지요. 남들이라고 다 비 오는 날 우아하게 음악 들으면서 차나 마시며 사는 건 아닌데 말이에요. 그래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예보 확인해가며 하우스 문 올렸다 내렸다 하고, 아직 캐지 못한 감자가 빗속에 다 썩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고, 막 여물어가는 단호박이랑 참외도 걱정되고, 비실비실한 오이며 상추는 한심스럽고, 폭우에 자꾸만 픽픽 쓰러지는 대파들 보면 심란하고... 이러다보니 저절로 우울한 생각이 들었나봅니다.

토마토 세 그루가 줄지어 나란히 죽어 있습니다. 하우스 안까지 스며 들어온 빗물이 며칠동안 빠지지 못한채 고여 있자 뿌리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 겁니다. 토마토는 과습이 쥐약이기 때문에 장마철에 몇 그루씩 죽어나가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막상 이렇게 힘없이 죽어있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합니다.

다행히 다른 토마토들은 이렇게 예쁜 열매를 매달고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중입니다.

하우스 안 풀을 다 매고 내려오는데, 윗집 이웃이 길가에 핀 꽃을 카메라로 열심히 찍고 있는 게 보입니다. 무슨 꽃을 그렇게 찍고 있냐고 물으니, 자기도 이름은 모른답니다. 어디선가 몇 뿌리 얻어다 심은 꽃인데, 이렇게 예쁜 보랏빛 꽃이 피었다네요. 그리고 유독 주둥이가 긴 종류의 벌들이 하루종일 이꽃에 정신없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주변에 온통 화사한 꽃잔치가 한창입니다. 며칠 계속된 비에 더욱 싱그럽게 피어난 꽃들이 짙은 향기까지 내뿜으며 벌과 나비들을 불러들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곤충들 역시 장맛비에도 아랑곳없이 이 꽃 저 꽃 다니며 꽃가루 모으기에 열심이고요.

저도 잠시 진흙투성이 호미를 내려놓고 주변 꽃들을 찍어보기로 했습니다. 나리인지 백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화사한 노란빛 꽃이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더욱 환하게 빛이 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가지 꽃들. 장마가 지든 바람이 불든 그저 무심히 자기 꽃을 피워낼 뿐인 이 조용한 생명들. 조바심 치던 마음을 아무래도 이 꽃들 아래 가만히 내려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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