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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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09년

양은 쟁반

백화골 2009. 8. 17. 22:38

우리 집에는 귀농하던 첫 해부터 부엌 살림으로 합류한 양은 쟁반이 하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고풍스런 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 ‘옛날’ 쟁반입니다. 
5년 동안 막 굴려가며 쓰다보니 벌써 꽃 그림이 많이 닳아버렸네요

서울 집에 살 때는 큰 쟁반이 전혀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엌에서 요리한 음식들을 쟁반에 담아 이리저리 옮겨 다닐 일이 없었으니까요.
가끔 손님들이 오셨을 때 우아하게 커피잔 몇 개 올려 나르는 용도로는 팬시한 디자인의 자그마한 플라스틱 쟁반으로도 충분했지요.

그런데 마당 있는 시골집에 살다 보니 한꺼번에 많은 양의 그릇을 나를 수 있는 넉넉한 크기의 쟁반이 필수더군요. 그것도 흙바닥 위에 막 굴려가며 써도 될 만한 튼튼한 막쟁반이면 더 좋구요.

손님들과 함께 마당에서 고기판을 벌일 때마다 조그만 쟁반에다 몇 번에 나눠서 그릇 나르기를 되풀이한 끝에, 성가신 것을 견디지 못하고 큼지막한 양은 쟁반을 사게 된 것이랍니다.

쟁반을 고를 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장터 그릇가게에서 파는 유일한 종류의 쟁반이었으니까요. 온니 원 디자인, 꽃 양은 쟁반!

사실 너무나 고풍스럽고 촌스러운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투덜투덜 하면서도 새 부엌 식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나고 몇 개월 전.

서울에서 빈티지 소품 가게 오픈을 물색하던 친구가 놀러왔다가 이 양은 쟁반을 보고 그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너무 예쁘다!’를 연발하며 좀 작은 크기로 사서 벽에 장식용으로 걸어놓아도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빈티지 소품 가게를 오픈하면 물건을 떼어다 팔고 싶다고까지 했습니다.

친구 말을 듣고 보니 막연히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모란꽃 그림이 다시 보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닳고 닳은 정형화된 디자인이 최신 감각의 ‘빈티지 디자인’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얼마 전 놀러왔던 언니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자기도 똑같은 쟁반을 사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갔습니다. 

며칠 전 장날 언니 부탁이 생각 나 새 양은 쟁반을 사왔습니다. 역시 그릇가게에선 온니 원 디자인의 이 양은 쟁반만을 팔고 있더군요.

그런데 집에 와서 헌 쟁반과 새 쟁반을 무심코 비교해 보다가 두 쟁반의 디자인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 다 모란꽃인 것은 맞는데 꽃송이의 형태와 위치가 확실히 다릅니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삼영’, 다른 하나는 ‘진광’이라는 회사에서 만들어졌네요. (회사 이름 역시 굉장히 고풍스럽습니다. ^^) 양은 쟁반의 모란꽃 디자인도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한 걸까요? 아니면 원래 회사마다 각각 다른 버전이 있었던 걸까요?

아무튼 제 눈에는 5년 동안의 손때가 묻은 헌 쟁반의 모란꽃이 더 예쁘게 보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빈티지 디자인’의 핵심은 바로 이 ‘오래 되어 손때 묻은 것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시골 장터와 시골집들이야말로 빈티지의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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