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백화골에 해가 났다.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농산물가족회원 발송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침 나절 잠깐동안만 비가 내리더니 먹구름 사이를 헤집고 푸른 하늘이 간만에 고개를 내밀었다. 힘들게 나온 해를 보니 얼마나 반갑고 기분이 좋던지. 아직 장마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데, 힘내서 농사지으라고 하늘이 하루 맑은 날을 내려줬나 보다 하면서 부지런히 밭에서 일했다.
애호박이 거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 해가 안 뜨면 수확량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확 줄어든 적은 처음이다. 참 어려운 시기로군 하며 몇 개 안 되는 애호박을 따서 돌아와야 했다.
이른봄에 심어 냉해를 입었던 가시 오이. 한동안 비실비실 하더니 막판에 기운차게 뻗어 올라간다. 하우스 천장까지 줄을 타고 올라가는 기세가 대단하다. 하지만 역시 오이도 수확량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상추가 완전히 딱 굳었다. 전혀 자라지 않는다. 아예 이번 주 상추 발송은 포기했다. 이런 날씨 때문에 공판장 가격이 4kg 한 박스에 3만7천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상추가 자라질 않으니 값이 비싸도 농민들에게 큰 도움이 못 된다.
여름 오이로 심은 백다다기다. 가시오이나 토종오이에 비해 백다다기 오이는 병이 많다. 원래부터 허약한 체질을 타고나나 보다. 몇 년째 금세 병으로 끝나버려 재미를 못 봤다. 올해는 조금 더 신경 써서 키워 보려 했는데 올라오는 기운이 약하다. 아무래도 수확량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보통 고추는 친환경 농사가 어렵다고 하는데, 가장 큰 원인은 산성비라고 한다. 비를 통해 병이 오고 수확량이 줄어든다.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하우스에서 친환경 고추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우스에 심고 깨끗한 지하수로 물을 주면 어지간하면 병이 안 오고 잘 버틴다. 장마가 오래 계속되는데도 풋고추만은 의연하게 잘 자라고 있다.
노지에 심은 가지가 잘 자란다. 비가 많이 와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다.
잘 될까 걱정하며 심은 여름 브로콜리. 초반에 진딧물과 벌레를 1주일 넘게 매일 매일 손으로 잡아준 보람이 있나보다.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벌레가 없어지더니(참새가 자리 잡고 벌레를 먹어준다), 갑자기 쑥쑥 자라나 어느새 꽃대 자리가 잡혔다. 2~3주 후면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다.
깻잎 따는 일은 고행이다. 한 장 한 장 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밭에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릎을 꿇는다. 천천히 깻잎을 따며 명상을 한다. 언젠간 다 따겠지 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말이다. 성질 급한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린다.
오랜만에 해가 났다. 오후에 갑자기 쨍쨍 내리쬐는데 무척 더웠다. 그래도 해 보니 사람도 작물도 다 반가웠다.
한창 잘 자라던 피망이 성장세가 뚝 끊겼다. 그 자리에 슬그머니 탄저병이 찾아와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다.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이웃해 있는 밭 할아버지다. 하루종일 밭에서 혼자 일해서일까, 외로운 시골 사람들이 많다. 만나기만 하면 붙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마음은 바쁘지만 얘기를 듣다보면 나름대로 재밌다. 오늘도 요즘 장마 이야기며 농산물 가격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드렸다. 비가 많이 와서 가지 값이 좀 오르겠지 하시며 열심히 가지를 따셨다.
옥수수가 익어간다. 수염이 완전히 마르면 수확하는데, 다음주 정도면 될 것 같다. 하지만 복병은 고라니! 이 놈이 아직은 이 밭에 직접 오지는 않았다. 들깨를 심으면 냄새 때문에 안 온다고 해서 들깨를 심은 덕인지. 작년에는 고라니 때문에 옥수수를 1/3밖에 수확을 못했다. 올해는 옥수수를 지키기 위해 이러저러한 대비를 하고 있다.
당뇨와 성인병에 좋다는 야콘. 뿌리만 좋은 게 아니라 잎도 좋다고 한다. 상추와 쌈채소가 안 자라 못 보내는 틈을 야콘잎으로 채웠다. 약간 씁쓸한 맛이 나지만 특유의 상쾌한 향기는 일품이다.
수수를 심어 놓은 마을 이웃의 밭이 오랜만에 비추는 햇볕을 받아 예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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