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5일(토) 아침 6시에 일어났다.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른 시간이다. 장수의 아침 날씨는 아직도 겨울.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천천면 농협 앞 약속 장소에 가보니 한창 못자리 내는 바쁜 철인데도 장수군 농민회 회원들이 군산항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리는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모여있다.
쌀개방 국회 비준에 이어 한미자유무역협정까지 체결되면 그야말로 농촌은 끝이다. 재작년에 1가마니에 17만원 하던 쌀값이 작년엔 13만원까지 떨어졌다. 벼농사가 수지가 안 맞아서 논에 다른 밭 작물이 들어간다. 당연히 밭작물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농산물 가격은 폭락, 작년에 오이 15kg 한 상자에 7백원, 양상추 8kg에 1천원 하는 걸 눈으로 목격한 터이다.
다들 피곤한 눈을 부비며 차에 올랐다. 2시간을 달려가니 순창, 고창, 전주 등 전라북도 각 지역에서 달려온 농민회 회원들이 군산항 부두 앞에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군산항에 수입쌀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농민회 전북도연맹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주로 벼농사를 많이 짓는 전북 농민들은 발언을 통해 울분을 토해낸다.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일해도 수지가 안 맞아서 농사를 포기해야 하는 마당에 미국 농산물까지 대량으로 들어오면 한국 농촌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 한 농민은 "그래도 봄은 오고 꽃은 핍니다. 우르과이라운드부터 작년 쌀개방국회비준까지 한번도 이겨본 적 없는 싸움이지만 이번만은 결코 승리해야 합니다. 농촌에 마지막 희망을 한번 피워봅시다"라며 참석자들에게 더 힘차게 싸울 것을 호소한다.
군산항 집회를 끝내고 각자 버스에 올라 서울 대학로를 향해 달렸다. 서울 대학로에 도착하니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농민, 노동자, 학생,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대학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지난 해 두 농민이 노무현 정권의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아 돌아가셨던 11월 농민대회 이후 첫 상경길이다. 당시 무지하게 곤봉을 휘둘러 대며 농민들을 두들겨 패던 경찰들은 단 한명도 구속되지 않았다. 대낮에 거리에서 경찰이 사람을 때려 죽였는데도 사법처리된 경찰 하나 없는 것이 '대한민국자유민주주의의' 초라한 현실이다. 이날은 경찰이 시위대를 괴롭히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와 언제 봐도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드는 영화배우 안성기씨 등이 발언을 했다. 졸속적으로 추진되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결국 한국의 농촌, 교육시장, 의료시장, 영화계 등 국민 생활의 모든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게 주요 요지였다. 미국과 우리나라가 단 한번이라도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한 적이 있었던가? 미국 농산물 수입해서 한국 핸드폰과 전자제품 주로 팔겟다는 게 FTA의 주요 내용일진데, 그렇게 판 핸드폰과 전자제품으로 번 돈이 국민들에게 돌아올까? 수출 위해 희생한 농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혜택이 돌아올까? 아닐 것 같다. 전부 재벌과 보수정치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겠지.
너무도 힘겨운 싸움에 길들여진 탓인지 농민들은 집회에 참석하면 술을 마신다. 안타까운 현실, 답답한 농촌을 생각하면 술 한잔 마셔야 한다. 집회 장소를 지나는 사람들이야 집회에서 왠 술이냐며 한소리 하고 지나갈 수 있겠지만, 자신들이 흘린 땀과 노력에 비해 손해만 보면서도 땅을 지키는 사람들이다.수입개방에 맞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농민들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서 가장 재밌는 것이 FTA 체결로 사회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말이다. 미국 농산물이 수입되고 교육시장과 의료시장이 개방되면 농촌 망하고 교육비와 의료비 오르고, 게다가 한국 영화를 비롯한 모든 문화계가 타격을 받을텐데, 어떻게 사회양극화가 해소된다는 것인지. 아마도 노무현 정권은 FTA 체결로 수출을 늘려 단기간의 경제성장으로 뭔가 성과를 내고자 하는 것 같은데, 이러다 한줌도 안 되는 부자들은 돈 많이 벌겠지만 대부분의 농민, 노동자, 서민들은 다 죽게 생겼다.
집회가 끝나고 다시 차에 올라 장수로 돌아오니 밤 11시가 넘었다. 기분이 착잡했다. 나름대로 농사지으며 평화롭고 여유롭게 살고자 시골에 내려왔는데 현실은 만만치가 않다. 미국 농산물이 본격적으로 수입 개방 되면 더욱더 농사 짓기 어렵고 살기 어려워질텐데.
한숨쉬며 인터넷을 켜 보니 언론에서는 FTA 반대 집회 소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과 재벌들이 얼마나 주력하는 일이면 이 정도로 언론작업을 해놨을까 안타까웠다.
게다가 인터넷에서는 집회를 왜 했는지, 누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등 내용은 거두절미한 기사들, 'FTA 집회 후 거리 욕설 낙서' 등의 제목으로 '본질을 호도하는 전형적인 기사'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약자들, 농민, 노동자, 서민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는다. 당연히 거리에 나가 행진 하면서 낙서라도 하는 것으로 목소리를 알리고자 하는 게 절박한 집회 참석자들의 심정. 게다가 낙서하면서 욕하는 거야 하나의 문화 아닌가.
Fukking USA!라는 미국을 욕하는 노래도 한 때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대통령을 욕하는 건 버릇없고 안 되는 일인가? 아니다. 그런 권위주의가 한국을 망친다.당연히 욕할만한 상황이니 욕하는 거지. 욕도 하나의 문화고 민의다.그리고 집회에서 낙서하는 문화는 후진국 문화가 아니라 오히려 선진국에선 더 과격하고 파격적인 '선전 행위'가 벌어진다.
후진국에서는 아예 그런 집회조차 못하겠지. 한미자유무역협정은 결국 모든 대한민국, 약소국 국민들의 삶을 피폐화시킬 것이 뻔한데도 당장 '농약 덩어리라도 싼 미국 농산물을 먹는 것도 자유 아니냐', '농촌 다 죽어도 핸드폰 더 팔면 경제 성장 되는 거 아니냐'며 이야기하는 사람 들앞에서 힘이 빠진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추워지는 지. 봄이 왔는가 싶었는데 지난 밤엔 영하로 기온이 내려갔다.
'농부의 하루 > 2005년~200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릿고개를 넘어서게 해주는 고마운 산나물! (2006.04.25) (0) | 2009.03.04 |
---|---|
토마토 정식 준비로 할 일은 많은데, 3일째 강풍은 불어대고... (2006.04.20) (0) | 2009.03.04 |
싹 틔운 감자와 쌈채소, 만발하는 진달래꽃에 취하다! (2006.04.13) (0) | 2009.03.04 |
무시무시한 막걸리 카피! (2006.04.06) (1) | 2009.03.04 |
농촌에 피어나는 따뜻한 봄기운! (2006.04.02) (0) | 2009.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