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이 벌에 쏘여 병원에 갔었다. 응급실에 누워 치료를 받고 있는데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아저씨가 “계남면에도 말벌이 많아요?”하더란다. “네, 마을 밖에서 일하다 쏘인 거예요”라고 하면서도 좀 어안이 벙벙했다고.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였던 것이다.
한번은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데, 같이 먹던 사람들이 식당 아줌마를 보며 수근댔다. “저 아줌마 남편이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지? 그래도 저렇게 웃으며 사는 거 보면 참 억센 여자야” 하는 거다. 식당 손님일 뿐인 사람들이 어떻게 저 아줌마의 사생활을 낱낱이 알고 있을까? 어쩜 이토록 사생활 보장이 안 된단 말인가?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상황은 이랬을 게다. 아저씨가 밤늦게 음식점 집기를 부시고 부부싸움을 크게 했다. 그러면서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했을 터이고, 혹은 다른 여자를 데려와서 사람들이 봤을 테고. 그런 이야기를 지나가던 이웃이 보고 들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1주일 새 장수군민들이 다 아는 이야기가 된다.
- 낯선 사람에게 갑자기 듣는 말 “계남면 사시죠?”
농촌 생활 시작하면서 제일 답답했던 것은 익명성 보장이 안 된다는 점이다. 도시 같으면 익명성 때문에 서로서로를 소외하고 외롭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들을 할텐데, 농촌에서는 익명성 보장이 안 돼서 부부 싸움 한번 큰 소리 내서 못 한다는 말이 나온다. 답답할 때가 많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 조금만 실수하면 사생활이 금방 까발려지는 현실이 싫었다. 그래서 좋은 이웃이라도 가족처럼 지내는 일은 삼간다. 조금이라도 사생활을 보장받으려면 아주 조심해야 한다.
인구가 적고, 이것저것 연결되어 있는 게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잘 안다. 어디 가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반드시 “어디에서 왔어요?”하고 묻는다. 새로운 얼굴이라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아니, 물건 사는 거랑 어디 사는 거랑 뭐가 연관이 되냐고 되묻거나, 그건 왜 물어요 하다가 요즘에는 그냥 저~기 높은 산밑에 살아요 하며 웃는다. 그런 면에서 보면 도시에서의 익명성은 오히려 사람들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익명성에 가려져 사생활을 보장받고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시골에서는 우리 같은 30대가 거의 없기 때문에 눈에 확 띈다. 그것도 농사짓는 30대는 찾기가 아주 귀한 일이라, 장수군민 모두가(^^) 우리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이젠 장날 가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계남면 꼭대기 마을에 사시죠?”하고 “거기 길 포장은 이제 좀 됐나요?” 한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이젠 익숙해져서 그냥 웃으면서 잘 대답하곤 한다.
- 익명성 대신 주체적인 삶
농촌에서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주로 입방아에 오른다. 특히 생전 마을 청소할 때 한번 안 나오다가 지원 사업이 있다면 어떻게 알았는지 달려와서 챙기려는 사람들, 다른 사람 지원 받을 것까지 뺏어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시끄러워진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익명성 보장이 안 되니 조금이라도 나쁜 일을 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사람은 금방 소문이 난다.
도시에서는 누가 얼마 버는지 금세 알기 힘들지만 시골에서는 누구나 다 안다. 밭 상황을 매일 매일 보고 있고 가격에 따라서 ‘성적표’가 바로바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밖에다 빌린 땅인 경우에는 각별히 신경이 쓰인다. ‘귀농해서 농사도 잘 못 지으면서’ 이런 말을 들으면 무지 기분이 나쁘다. 장수는 예로부터 산골 오지 지역이라 텃새가 심한 편인데, 외지 사람이 와서 게으르게 밭 관리하거나 제대로 농사 못 지으면 거의 사람 취급 못 받는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농사도 잘 지어야 하고 착하게도 살아야 한다. 며칠 전에 익명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가 “익명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생활이 오히려 스스로에게 책임지고 떳떳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 되는 건 아닌가”라는 말을 하여 동감이 되었다.
농촌에서의 지나친 사생활 침해나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은 좋아하지 않지만 익명성 보장이 안 되는 현실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일만은 아니다. 최대한 사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자기 행동에 떳떳하게 책임질 수 있는 생활을 한다면, 농사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듯이 농촌 생활을 통해서도 주체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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