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여행길에서 만난 스님이 이사를 하신다고 연락을 하셔서 잠시 일을 접고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황매암에 놀러 갔습니다. 장수에서 차로 30분.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더군요. 책이 대부분인 이삿짐 정리를 도와드리고, 차(茶)에 정통하신 스님께서 내주시는 향기로운 차와 함께 평화로운 오후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물고문 하는 걸로 유명한 거 모르는구나. 이 차 좀 더 마셔봐.”
“우리 풍악 좀 울려볼까? 존 바에즈라고 내가 아주 좋아하는 아지매야.”
소탈하고 넉넉한 인품의 스님 덕분에 다양한 차들로 아주 행복한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창밖으론 지리산 능선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데, 포크 가수 존 바에즈의 청아한 목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시고 있노라니 화창한 오후 햇살 속에 갑자기 때 아닌 눈발이 하얗게 흩날리더군요. 잠시 신선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얼떨결에 스님에게 다기 세트까지 선물 받아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런 멋진 다기를 집에 두고서 계속 커피믹스나 끓여 먹는다는 건 말이 안 되겠지요?
온국민이 커피믹스 중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나라 차문화는 사실 인스턴트 커피가 꽉 잡고 있는 현실이지요. 시골에선 그래도 덜 먹지 않느냐고요? 아니요, 저희는 시골 내려와서 오히려 더 많이 먹게 됐는 걸요.
도시 사람보다 시골 사람이 커피를 더 마시는 것 같아요. 별다른 간식거리는 없고, 힘들게 몸 쓰는 일들을 많이 하니까 달달한 게 땡기긴 하지요. 할머니들은 아침점심저녁으로 보약처럼 커피믹스를 끓여 드시기도 합니다. 여럿이 두레 일을 할 땐 하루 몇 차례씩 커피 대접하는 게 필수 중의 필수이고요. 이러다보니 저희도 점점 인스턴트 커피에 중독돼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인스턴트 커피가 몸에 안 좋은 건 다들 아는 사실인데 말이에요. 마시고나서 입안에 남는 텁텁한 뒷맛도 참 개운치가 않지요. 게다가 커피, 프림, 설탕 모두가 다 멀리서 들여와야 하는 수입품이잖아요.
좋은 다기도 생겼겠다, 요모조모 좋을 거 하나 없는 커피믹스 이참에 확 끊어볼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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