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가 계속된다. 한낮에는 일을 못할 정도로 푹푹 찐다. 올 여름 긴긴 장마로 나름대로 시원하게 보냈는데 이 정도 더위쯤은 한번 맛봐야지 하는 듯이 날씨가 덥다. 그래도 조금씩 온도가 내려가는 것이 느껴져서 기분 좋게 땀 흘리며 일하는 하루하루다.
땅콩, 들깨, 옥수수가 아주 잘 자랐다. 가을 옥수수 심는다고 푹푹 빠지는 밭에서 고생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람 키보다 훨씬 더 컸다. 이 밭에 고라니가 들락날락하는데 이번에는 주변에 울타리를 확실하게 쳐서 피해를 줄일 계획이다.
가을 작물 심기를 시작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 오전에 부랴부랴 무씨를 사다가 만들어놓은 밭에 심었다.
무를 심고 올라와 참외밭을 정리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가 맞았다. 가을 무가 잘 자라려나보다.
여름 무 수확이 끝났다. 무를 보내고 무청을 말린다. 봄, 가을에는 그냥 널어 말려도 잘 마르는데 여름에는 살짝 데쳐서 말려야 잘 마른다고 한다. 마당에서 물을 끓여 무청을 말리기 작업을 했다.
바람이 잘 통하는 툇마루 앞에다 무청을 말리기 시작했다. 더운 날 물 끓여가며 널어놓은 만큼 맛좋은 무시래기가 나왔으면 좋겠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1년에 한 번 바다에 놀러 가는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얼른얼른 일 마치고 사람들과 함께 남해 바다로 달려갔다. 산골 사는 사람들의 바다 나들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람 사는 게 상대적인 거라 매일 산 속에서만 살다보면 바다가 그리워진다. 특히 해산물을 먹을 기회가 없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루종일 지치도록 수영하고 저녁에 회를 실컷 먹고 돌아왔다.
한낮에는 역시 푹푹 찐다. 백화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더운 공기가 느껴진다.
오미자를 따러 백화산에 올라갔다. 오미자는 8월 말부터 익기 시작하는데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 고사리처럼 따도 계속 올라오는 게 아니라 한번 따면 끝이라서 더욱 힘들다. 우리도 첫해에 한번 따 보고 몇 년을 구경도 못했다. 어디서 나타나는지 이 때만 되면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 오미자를 따러 올라간다. 올해는 맘먹고 일찍 산에 올라가 봤는데, 아직 조금 덜 익었다. 그나마도 조금이라도 익은 건 거의 다 따간 뒤다.
초승달이다. 해가 지고, 하루 일을 마무리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평화로운 하루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잠깐 하우스를 보러 나가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깜깜한 마을길 한가운데로 웬 경운기 한 대가 올라온다. 누군가 가까이 가 보니 아랫마을 할아버지다. 달걀을 사러 왔다는데, 양계장 집에는 마침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말을 해 보니 완전히 만취 상태다. 조심스럽게 “경운기 그냥 두고 가세요, 많이 취하셨네요.” 했더니 화를 버럭버럭 내며 끝까지 경운기를 몰고 내려가신겠단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할아버지가 경운기 운전하시는 걸 걱정스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잠깐 사이 경운기가 뒤로 밀리며 할아버지가 깔리는 사고가 나버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경운기 밑에서 꺼내 보니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난다. 이런 와중에도 괜찮다며 또 경운기를 몰고 내려가시겠단다.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어 윗집 이웃을 불러 경운기 몰고 내려가는 걸 부탁한 뒤 할아버지는 트럭에 태워 장수읍에 있는 의료원으로 향했다. 술 취한 채로 계속 병원에 안 가겠다고 우기시는 걸 간신히 설득해 겨우 병원에 도착. 의사가 상처를 치료해 보더니 장기가 손상된 것 같다며 전주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한단다.
자식이 열이나 된다는데 다 객지 나가 살고 이 밤에 할아버지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는데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식들 다 키워봤자 시골에 남은 사람 하나 없고,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서 외로이 말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시간은 밤 10시30분. 전주까지 할아버지를 모시고 가려는데, 간호사가 내 난감한 처지를 이해했는지 일단 집에 가서 119를 부르면 앰블란스가 전주까지 모셔다 드릴 거라며 귀뜸을 해준다. 전주까지 가는 동안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와서 119에 전화하고 전주에 갈 준비를 하는데,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할아버지는 또 소주를 컵에 따르더니 벌컥벌컥 마신다. 다행히 5분도 안 돼 119가 도착, 할아버지는 전주로 향하셨다. 하루가 참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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