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 휴가철 한가운데인가 봅니다. 휴가 가시는 회원분들 발송 변경사항을 붙여놓은 포스트잇으로 컴퓨터 위쪽 벽면이 빽빽합니다. 이번 주만 다른 주소로 보내달라는 분, 아예 발송을 건너뛰었다가 나중에 다른 농산물로 대체해 받으시겠다는 분, 요일을 바꿔서 받으시겠다는 분... 변동사항이 많아 좀 헛갈리긴 하지만, 이것도 몇 해 노하우가 쌓여서 꼼꼼하게 적어놓기만 하면 걱정 없습니다. 휴가 가시는 분들, 모두 다 잘 다녀오세요. 그동안 비 때문에 축축하게 늘어져 있던 몸과 마음에 뽀송뽀송한 활기를 채워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백화골엔 물론 여름 휴가 같은 건 없습니다. 어제는 당근 심고, 오늘은 양배추 심고... 가을 작물들 넣느라 요즘 한창 정신이 없답니다. 하지만 모두들 휴가 떠나는 모습을 보니 저희도 약간 마음이 살랑살랑하네요. 여름 휴가는 못 가지만, 지난 겨울 휴가 때의 추억을 떠올려보며 휴가 기분을 내보렵니다. 오늘은 말하자면 휴가철 특집입니다. ^^
작년 겨울 휴가 코스 중 중국과 북베트남은 생략~ 추위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왠지 여름 휴가철에 떠올려보는 추억으론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나머지 한 나라, 스리랑카를 떠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도 바로 밑에 물방울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섬나라 스리랑카. 이곳은 유난히 초록빛이 아주 짙은 나라, 우리나라 사람 못지 않게 매운 음식을 즐겨 먹지만 성격은 정반대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착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그리고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 싱글싱글 웃으며 좋아해주는 나라입니다.
관광객은 거의 오지 않는 작은 어촌 마을을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해변에 앉아 동네 청년들이 크리켓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국사람이에요?” 어디선가 들리는 어눌한 한국말. 스리랑카를 여행하며 종종 겪었던 일인데,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일하다 온 분들이 이렇게 인사를 건네오는 경우가 가끔씩 있습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모아온 돈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거나 삼륜 택시를 사서 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더군요. 다른 나라라면 이런 경우 호객행위나 사기로 이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반가움보다는 경계심이 앞서기 마련이지만, 스리랑카에서는 곧 경계를 풀어도 된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모두들 그냥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할 뿐이었으니까요. 어촌 마을 해변에서 만난 한국 이주노동자 출신의 와산타 씨와도 반갑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어찌어찌 집에 놀러 오라는 초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저녁 때 방문한 와산타 씨네 집. 할아버지 할머니, 아이들과 가족들 모두가 나와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해줍니다. 그러더니 거실 TV 옆에 소중하게 놓아둔 액자를 보여주더군요. 한국에서 일했던 공장 사장님과 와산타 씨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눈에 익은 이 일명 ‘금은방 시계’도 와산타 씨가 귀국할 때 한국에서 힘들게 가지고 들어온 물건이라고 하네요. 한국에 대한 추억들을 즐겁게 풀어놓는 와산타 씨를 보며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에 대해 앙심 같은 걸 품고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편견이란 걸 알았습니다. 와산타 씨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마음씨 좋은 한국 사장님, 고맙습니다!
스리랑카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인 ‘라이스 앤 커리’, 우리나라로 치면 가정식 백반 정도 되는 음식입니다(참고로 스리랑카에선 반드시 ‘라이스 앤 커리’라고 말해야 합니다. ‘커리 앤 라이스’라고 하면 대부분 못 알아듣더군요).
이번엔 관광객들로 우글거리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를 여행할 때였습니다. 현지인 물가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외국인 물가 때문에 대부분의 끼니를 빵과 비스킷과 바나나로 때운지 며칠. 어느날 게스트하우스 아주머니가 우리를 부르더니 오늘 점심에 어디 갈 거냐고 묻습니다. “아무 데도 안 가는데요?” “그러면 오늘 점심은 내가 한 턱 쏠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스리랑카식 백반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립니다. 부엌에서 두어시간 동안 뚝딱뚝딱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주머니가 며느리와 함께 접시들을 들고 나옵니다. 굶주리는(?) 불쌍한 외국인을 위해 아무 사심 없이 이런 정갈하고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신 마리 아주머니. 이날 점심은 스리랑카에서 먹었던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이 동네 물가는 터무니없이 너무 비싸졌어. 그렇게 비싼 곳들 가는 거 별로 안 좋아. 너희들 선택이 현명한 거야.” “2층에 바다 전망이 가장 좋은 방이 있어. 그 방은 우리 아들 며느리한테 내줬어. 돈 안 벌어도 가장 좋은 방은 아들 내외가 쓰는 게 내 마음에 좋아.” 도대체 민박집 영업하시는 분이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계시면 언제 돈 버시냐고요~ 덕분에 흥청망청 그렇고 그런 휴양지로 기억될 뻔한 곳이 기분 좋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답니다. 고마워요, 마리 아줌마!
이 가게에서 킹 코코넛을 먹기 위해 이 도시를 여행하는 3일 내내 출근 도장을 찍었습니다. 킹 코코넛은 스리랑카에서 마실 수 있는 음료수들 중에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가장 맛좋은 음료수입니다. 이런 이국적인 과일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배가 터지도록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외국여행을 하는 자잘한 기쁨들 중 하나일 겁니다.
주변에 볼거리 하나 없는 국도변의 허름한 구멍가게. 이 가게를 지키는 이는 아주 늙은 할머니와 그보다 더욱 늙은 할아버지 이렇게 두 분인데, 할아버지는 어찌나 늙으셨는지 눈은 앞을 거의 못 보시는 것 같고, 말도 제대로 못 하시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셨습니다. 이렇게 늙으신 분이 큰 칼을 휘두르며 코코넛 껍질 하나는 어찌나 예술로 잘 까시던지요.
평생 몸에 익은 일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코코넛을 먹기 위해서보다는 할아버지의 감동에 가까운 코코넛 까는 모습을 보기 위해 꽤 먼 길을 걸어 그렇게 열심히 이 가게에 출근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할아버지의 그 자연스러운 친절과 미소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몸에 밴 따뜻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와 친절이 되고, 미소가 되는 그런 할아버지였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 만큼이요.
그러고보니 여행의 추억은 곧 사람에 대한 추억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여행길을 떠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스리랑카에서 만났던 사람들 모두 잘 평화롭게 잘 지내시길... 내일은 가을 쌈채소들 심을 밭을 만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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