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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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하루/2005년~2006년

산 넘고, 바다 건너! 한미 FTA 반대 제주 원정기 (2006.10.25)

백화골 2009. 3. 4. 10:39

10월22일 새벽 4시 농민회 사무실앞 - 장수군 농민회 제주 원정대 출발!

새벽 바람이 차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인사가 오간다. 바쁜 수확기인데도 많은 회원들이 짐을 챙겨 나온다. 제주도에서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될 거라는 소식에 전국의 농민, 노동자들이 제주도로 모이는 길. 반대 목소리가 큰 만큼 사람들이 덜 모일 수 있는 제주도로 장소를 정했나 보다. 원정대에 참석하려고 트럭 헤트라이트를 켜고 전날 밤늦도록 들깨를 털었다. 피곤으로 몸이 천근만근, 봉고차 두 대로 장수군 농민회 한미 FTA 반대 제주 원정대가 출발했다.

22일 오후 2시30분 - 전경과 함께 배타고 제주도로다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농민들이라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갔다. 비행기 타면 1시간이면 갈 곳인데 배를 타니 무려 5시간이 걸렸다. 속이 울렁울렁, 밖에 비는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고. 배 안에서 전국농민회 전북도연맹 회원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가보는 제주도, 하지만 집회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서인지 설레임은 덜하다. 배 안에는 시위를 진압하러 가는 경찰도 함께 탔다.

제주도에 도착, 기념 사진을 찍었다.

전경들도 같은 배를 탔다. 함께 오면서 보니 아주 어린 청년들이던데, 제주도 집회 장소에선 무섭게 돌변하게 된다.   

22일 오후 3시30분 제주공항앞 - "우리 농민 다 죽이는 한미 FTA 반대한다!"

경찰들이 철통같이 제주 공항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첫 번째 집회를 공항 입구에서 가졌다. 제주원정 시위대가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제주도의 비, 바람은 거셌다. 제주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제주도에서 협상을 진행하려 하자 도지사까지 모두 반대를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귤을 협상 예외 품목으로 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로 겨우 제주도민을 설득했다고. 물론 이를 믿는 제주 도민은 많지 않았다.  

공항 앞 집회, 경찰이 차량으로 입구를 막았다.

집회 끝나고 길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 행사 기간 내 도시락으로 길바닥에서 끼니를 때워야했다.

제주도에 오기는 왔나보다, 거리 곳곳이 귤밭이다.

“야, 고구마 엄청 잘 자랐네”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고구마가 넝쿨처럼 길게 자랐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돌이 많다는 제주도, 무덤가도 돌로 쌓아놨다.  

22일 저녁 7시 - 제주도 컨벤션 센터 앞에서 문화제

전국농민회, 한국농업경영인협의회, 민주노총, 한국노총, 민주노동당 등 한미FTA에 반대하는 각 단체 회원들이 모였다. 바람이 몹시 불어서 주최측 관계자들이 무대를 밧줄로 튼튼히 매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열기는 뜨거웠다. 

한미 FTA 반대 문화제, 밤바람이 매서웠다.

23일 오전 8시 - 숲을 헤치고 골프장을 넘어 협상장소 신라호텔까지

본격적인 한미 FTA 반대 집회가 시작됐다. 경찰이 협상장소인 신라호텔 주변, 아니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관광객들도 아예 못 들어가게 하고, 콘테이너와 방파제 돌로 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자유롭게 다녀야할 길을 봉쇄하고 국민의 거주 이동의 자유, 의사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막아섰다.

그래서 이날 원정대 지도부에서 선택한 집회 방식은 '평화적인 게릴라 집회'. 경찰이 큰 길을 막고 있으므로 샛길을 따라 협상장 앞까지 진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제주도 농민들이 며칠동안 사전 답사하여 길을 찾아놨다고. 결국 숲 속 길을 게릴라처럼 헤치고 헤쳐서 신라호텔 20m 근처까지 접근, 협상단들을 향해 한미 FTA 반대를 외쳤다. 완전히 경찰의 허를 찌름 셈.

이른 아침에 게릴라 집회를 하기 위해 삼삼오오 걷기 시작했다.

깃발을 받아들고 제주도 농민의 길 설명을 들었다.

그 와중에도 경운기 위에 씌워놓은 덮개가 유용해 보인다며, 이 제주도 방식을 한번 시도해봐야겠다는 둥 농민다운 대화가 오고갔다. 

아주 좁은 숲길로 들어섰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파른 산을 타고 올라갔다. 경찰이 느닷없이 나타나지 않을까 숨을 죽이는 시간이었다.

산을 넘고 넘어 중문 골프장을 가로질렀다. 생전 처음 와보는 골프장의 넓은 잔디밭에 탄성! 이게 바로 산 완전히 깎아내고 농약 범벅으로 잔디 키워 환경 파괴하는 골프장이구나. 다들 처음이자 마지막일 될 가능성이 높다며 기념 사진을 찍기도…

기막힌 샛길 뚫기 작전으로 결국 협상장 앞 20m 근처까지 접근, 경찰이 막아서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위로 보이는 곳이 바로 협상장인 신라호텔.

다시 걷고 걸어 다음 집회 장소로 이동, 제주 도민들까지 합세한 도심 집회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야자수

한잔 술로 쓴 속을 달래고

23일 오후 5시 - 바다로 뛰어드는 원정대

골프장에서 나온 후 이번엔 도로에서 집회를 가졌다. 집회 후 협상장으로 다시 진입을 시도하려 했으나 컨테이너와 방파제돌로 아예 길을 원천 봉쇄한 경찰들. 지난밤에 길이 없으면 바다를 헤엄쳐 건너갈 수도 있다는 계획을 들었지만 설마 진짜일까 했다. 하지만 길을 막으니 어찌하랴 제법 쌀살한 날씨 속에서 50여평의 원정대가 바다를 헤엄쳐 건너 신라호텔 아래 바닷가까지 진출했다. 멋진 장면이었다. 헬기가 와서 촬영하고 주변엔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새통. 경찰에서는 어이없게도 "평화로운 제주에서 시위를 하는 통에 관광객이 줄어들 것"이라고 방송했는데, 길을 막아 시간을 끈 것은 경찰인 셈, 다들 이 장면이 방송되어 오히려 제주도 홍보가 더 되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길을 막아선 경찰들

위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전경차들, 길이 막힌 시위대 

길이 막히자 바다로 향하고 

바다를 헤엄쳐 건너가는 원정대 

응원하는 사람들 

하늘엔 방송국 헬기까지 동원되고 

해변가를 거슬러 신라호텔쪽으로 가려하나 이를 막는 경찰들. 영화 장면 같다!

횃불 집회로 이날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24일 오후 1시 - “저항은 폭력이 아니다”

작년 11월15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경찰들이 폭력 진압을 하여 한 농민이 맞아죽는 걸 바로 앞에서 보았다. 무시무시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분이 대통령인 나라에서 경찰이 사람을 때려죽였고, 아무도 살인에 대한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 농민 집회는 항상 분위기가 살벌하다. 하지만 작년에 농민이 죽었으니 올해엔 좀 나아질 줄 알았다.

몸싸움 이후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행사장 앞까지 평화롭게 진출해서 이 나라 농민, 노동자들의 의견을 알리고자 하는 일이 무슨 죄인가? 경찰들은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시위대를 짓밟고 집회 차량 유리창을 부시고, 운전자와 사회자를 개패듯이 두들겨 팼다(MBC 뉴스에 방송됐다). 아래 동영상을 자세히 보면 경찰이 시위차량 운전사와 사회자를 얼마나 짓밟았는 지 알 수 있다. 목숨을 건진 게 다행이었다.

경찰의 폭력을 담은 동영상(오마이뉴스)

케케묵은 논쟁이지만 시위대에게 폭력 협의를 뒤집어 띄우는 보수언론의 논리가 있다. 이날 상황을 보면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현실적이지 못한지 알 수 있다. 우선 1. 평화시위를 하려는 데 경찰이 아예 길을 막았다. 2. 집회 신고도 하지 못하게 했다. 3. 행진을 하려 하는데 길을 막았다. 결국 물대포가 쏟아지고 경찰이 폭력을 행사했다. 4. 흥분한 시위대도 저항했다. 이렇게 맞서는 게 폭력인가?
하지만 이날 4번 상황은 이어지지 못했다. 폭력 앞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원정대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평화적으로 집회를 하자는 지도부의 지침이 원정대에 내려온 터, 설마 경찰이 그렇게까지 돌변할 줄은 몰랐다. 어린 전경들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심지어 원정대를 향해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다. 저 어린 청년들을 어떻게 저렇게 폭력적으로 만들었을까?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에게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고 욕하며 조롱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야만적인 일이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어처구니 없었다.  
한 대학생이 발언을 통해 경찰의 살인적인 폭력에 맞서는 저항은 폭력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었다.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시위대가 폭력 경찰에 맞서는 저항은 폭력이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집회는 자신들의 의견을 알리는 자연스럽고도 즐거운 자리다. 집회에서 즐겁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날은 이 땅에 언제쯤 올 수 있을지.

24일 오후 5시 - 제주도를 떠나다!
착잡한 마음으로 오후 5시 배에 올랐다.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내용은 자세히 공개되지 않았다. 한국 대표라는 사람이 들어가 있는데 가장 이 협상과 관계가 있는 농민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재벌과 보수 정치인들만의 대표인 셈이다. 멕시코와 캐나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미국과 FTA를 체결하여 공공요금이 오르고 농촌이 완전히 망하고 서민 경제가 파탄났다. 10%를 위한 90%의 희생이 불 보듯 뻔한 이런 협상을 왜 진행하려는 것일까? 생애 첫 제주도 여행은 이렇게 씁쓸하게 끝났다. 관광지는 하나도 못 가보고 제주도 거리 곳곳과 밭 사이를 누비면서… 

제주의 해안가 너머로 해지는 모습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