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오늘 저녁, 우리 장수군 일원에서 촬영 중인 드라마 ‘아가씨를 부탁해’가 방송되오니, 주민 여러분께서는 빠짐없이 시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아침 6시. 밭에서 이것저것 쌈채소를 따고 있는데 아랫마을 이장님이 스피커로 방송하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진다. 평소 말하는 투와 전혀 다른 방송용 목소리를 가진 아랫마을 이장님. 귀농 첫해부터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인데, 이분 방송 목소리를 들으면 너무 재밌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아무튼 TV가 없는 우리로서는 ‘빠짐없이 시청’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어떤 드라마기에 장수군에서 촬영을 한다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농촌 드라마가 부활했나?

심지어 군청 게시판에도 이 드라마 포스터가 붙어 있다. 작고 작은 산골 동네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수군. 이번엔 드라마 협찬으로 홍보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 꽤나 노력하는가 보다. 그런데 이게 뭔 일? 인터넷 뉴스를 보니 ‘아가씨를 부탁해’는 농촌 드라마가 아니라 재벌집 외동딸의 초절정 럭셔리 생활을 그리는 이야기란다. 엥! 장수군에 우리가 모르는 럭셔리한 곳들이 있었나? 도대체 어디서 뭘 찍는지는 몰라도, 드라마 보라고 이장님이 방송까지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있다.

이장님이 드라마 홍보 방송을 하시는 시간, 안개가 자욱하다. 아침부터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 날엔 ‘오늘도 낮에 꽤 따갑겠군’ 하고 각오해야 한다. 일교차가 커지면서 아침 안개도 점점 짙어진다.

가을 배추가 잘 자라고 있다. 이렇게 잘 자라는데도 쌈배추를 좀 많이 땄으면 하는 욕심이 생겨 어떻게 하면 배추를 더 빨리 자라게 할 수 있을까요? 하고 장수읍에 사는 우리 농사 선생님인 봉대형에게 물으니 너무 인위적으로 하지 말고 자연에 맡기라고 하신다. 아침저녁의 찬바람과 한낮의 뜨거운 햇볕, 장수군의 맑고 깨끗한 공기와 물이 배추를 잘 키울 거라면서.

봄에 톡톡히 벌레한테 작살났던 청경채. 이번엔 신경 써가며 초기에 유기농 방제를 했더니 깨끗하게 자랐다. 요즘 나오는 쌈채소들은 다 맛있는데, 청경채는 연하고 맛도 좋다. 상에 올려 놓으면 모양도 예쁘다.

브로콜리가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회원들 밥상에 오를 때까지 무사히 잘 자라주기만을 바라며 매일같이 물주고 벌레 잡아주며 가꾸고 있다.

가을 옥수수 수확을 시작했다. 울타리를 미리 쳐 놓아서 고라니 피해가 아직은 없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고라니가 활동하는 저녁 시간이면 밭에 가서 이것저것 확인한다. 1주일만 잘 버텨준다면 회원들한테 잘 발송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 우리가 심은 가을 옥수수는 팝콘용 종자다. 일반 옥수수에 비해 알이 작다. 말려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린다. 시중에서 파는 팝콘용 옥수수는 거의 대부분이 유전자 조작을 한 미국산이다. 국산 종자를 구해 유기농으로 키운 우리 옥수수는 미국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전하고 맛있는 팝콘으로 변신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여물길 기다린다.

땅콩도 수확할 때가 되었다. 올해는 잔뿌리가 막 뻗어나갈 때 비닐을 벗겨주고 복토를 해 주었다. 시험 삼아 한 포기 캐보니 이제 캐도 큰 무리 없을 정도로 잘 여물었다.

갓 캔 땅콩을 구워서 먹어보니 정말 맛있다. 농사일은 심을 때, 가꿀 때, 거둘 때, 시기별로 농민들에게 참 행복한 순간을 많이 선물한다. 밭에서 갓 수확한 농산물로 식탁을 꾸리는 일은 농민들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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