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골 푸른밥상

울주군 두서면 내와길187/010-2375-0748(박정선), 010-2336-0748(조계환)/유기농인증번호 : 07100003

유기농 제철꾸러미/2011년~2013년

김빠지는 농식품부 ‘CSA 활성화’ 정책

백화골 2013. 2. 16. 01:20

 

어제는 번갯불 콩 구워먹듯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양재동 화훼공판장에서 ‘CSA 활성화 토론회’라는 게 있었거든요.
 
며칠 전 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2월15일 오후 4시에 서울 양재동 화훼공판장에서 CSA 활성화 토론회가 있으니 참석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CSA는 보통 저희 같은 제철농산물 꾸러미 형태의 농업 유통 방식을 말합니다).  토론회에 참석하겠다고 서울까지 왕복하는 것이 심하게 부담스러웠고, 이미 모종들이 들어가 있는 상태라 한나절이나마 집을 비우는 게 걱정되긴 했지만, 여러 모로 고민한 끝에 한 번 가보자고 결론 내렸습니다. 장수 사는 농사꾼을 서울까지 불러올리는 걸 보면 우리에게 뭔가 듣고 싶은 말이 있거나 아니면 뭔가 중요한 말을 해주려는 거겠지...

 

한편으론 제철꾸러미회원제라는 직거래 방식을 처음 만들고 시작한 농가로서 조금은 뿌듯함도 가지고 있기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무슨 말들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토론회는 4시부터 6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어떤 교수님 한 분이 ‘CSA 사업의 활성화 방안’이라는 주제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이어서 농식품부 유통정책과 서기관이라는 분이 사업추진과 관련한 예산 내역과 지원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뒤이어 참석자들로부터 질의 응답을 조금 받긴 했지만 그냥 형식적인 수준이더군요. 그러니까 이름만 토론회지 그냥 일방적인 정부 정책 발표회나 다름없는 자리였습니다.

 

소농들의 자생적인 직거래 유통방식마저 규모화, 조직화하시려구요?

 

CSA는 직역하면 공동체지원농업이라는 뜻으로, 미국의 농산물 유통 방식을 말한답니다. 저희가 2006년 처음 제철농산물 회원제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회원제가 귀농자들이나 소농 생산자 중심으로 퍼지면서 어느 정도 정착되고 나니, 농업 연구자들이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시작한 것을 미국의 CSA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것이라고 해석하더군요.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의 CSA 방식과 우리나라에서 퍼져나가고 있는 제철농산물 꾸러미 방식은 다른 점이 아주 많답니다.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려면 영어 이름부터 갖다 붙이고 봐야 된다는 발상인가 싶어 저희는 일단 이 ‘CSA’라는 명칭부터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토론회에서 정말 허걱 했던 건 정부의 지원 방안이라고 발표된 내용이었습니다. CSA 활성화 사업을 위한 총 예산 규모는 110억. 그리고 그 지원 대상은 전국에서 딱 10군데만 선정하겠답니다. 지원 대상으로 응모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은 총 출자금이 1억원 이상이며 조합원은 10명 이상 되는 단체로 한정하겠다나요. 아무튼 이런 자격 조건이 되어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 공동 홈페이지를 만들어 관리하면서 2억원을 들여 홍보를 해주고, 1개소당 4억원 한도 내에서 공동작업장을 융자 지원하고, 3억원 한도 내에서 직매장을 보조 지원하고 등등의 지원을 해줄 계획이라고 합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기본적인 농업정책의 틀이 규모화, 조직화를 통해 강한 곳 몇 군데만 살아남게 하고, 현재 우리 농업의 근간을 이루는 소농들은 점차적으로 고사시키는 정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빈틈없이 적용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제철농산물 회원제는 거대 자본과 대기업, 비정상적인 농산물 유통 구조의 틈바구니에서 그래도 농사짓고 살아보겠다는 소농들이 근근이 시작한 일인데, 이런 작은 소농들의 자생적인 사업에까지 규모화와 조직화의 잣대를 들이대 정리를 하겠다는 것인지요. 저희도 그랬지만 혹시라도 회원제 운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먼 길 달려온 농민들이 다들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진짜 소농들의 제철 꾸러미 사업을 지원한다면 이런 식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농업 정책을 만들고 토론회를 하려면 농민을 들러리로 내세울게 아니라 토론자로, 연구자로 세웠어야지요.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토론회 참가 대상을 ‘출자금 1억원 이상, 조합원 10명 이상의 단체’로 못을 박고서 이름뿐인 ‘소농 지원 정책’이라는 타이틀은 빼버리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어제의 서울 나들이는 간만에 서울 구경 하고 길고 긴 드라이브 즐긴 걸로 그냥 만족하렵니다. 들러리는 사절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냥 ‘독립 농부’로 살아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