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멀리서 장수까지 놀러온 고마운 벗이 방문 선물로 책을 주고 갔습니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긴 제목을 가진, 그리고 긴 제목만큼이나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연설문과 잠언들을 모은 책인데, 백인 침략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방대한 세월동안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인디언들의 심오한 지혜가 담겨있더군요.
가장 재미있었던 건, 책 말미에 부록처럼 딸려있는 ‘인디언의 열 두 달 이름’이었어요. 유명한 영화인 ‘늑대와 춤을’ 아시지요? ‘늑대와 춤을’은 아시다시피 주인공의 인디언식 이름입니다. 주인공의 여자친구 이름은 ‘주먹 쥐고 일어서’였던가요. 아무튼 인디언 이름은 이런 식으로 대상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을 독창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짓기의 달인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열 두 달의 이름을 그냥 넘길 리 없지 않겠어요? 1월, 2월, 3월... 하는 재미없는 숫자 이름은 당연히 아니구요. 부족에 따라 아주 다양하고 예쁜 이름들이 붙어 있더군요. 그리고 농사짓는 사람 입장에서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너무나 공감가는 이름들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3월. 저희 블로그 독자라면 눈치 채셨겠지만, 사실 저희가 1년 중 가장 힘들어하는 달이 바로 3월이랍니다. 일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지만, 이것저것 할 일은 많은데 날씨는 한없이 변덕스럽고 바람은 쉬지 않고 불어대고... 인디언의 3월 이름들은 이렇습니다.
‘한결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달’ (아라파하족)
‘강풍이 죽은 나뭇가지 쓸어가 새순 돋는 달’ (동부 체로키족)
‘작은 모래 바람 부는 달’ (주니 족)
‘바람이 속삭이는 달’ (호피 족)
‘훨씬 더디게 가는 달’ (모호크 족)
‘눈 다래끼 나는 달’ (아시니보인 족)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 (체로키 족)
책에 나온 이름들 중 몇 가지만 뽑아봤어요. 마치 누군가 3월의 우리집 근황을 엿보고 붙인 이름 같습니다. 저는 올 3월에 모래 바람 맞으며 밭에서 일하다가 실제로 눈 다래끼가 나기도 했답니다.
그럼 이제 막 접어든 4월의 이름은 어떨까요.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 (검은 발 족)
---네, 어제 오늘 유난히 화창한 날씨 속에서 일하며 확실히 생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체로키 족)
---이보다 더 농가의 4월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 있을까요? 각종 씨앗들이 나란히 나란히 줄서있는 4월입니다.
‘얼음이 풀리는 달’ (히다차 족)
---아마 히다차 족도 장수처럼 추운 동네에서 살았던 부족인가 봐요.
‘옥수수 심는 달’ (위네바고 족)
‘만물이 생명을 얻는 달’ (동부 체로키 족)
‘곧 더워지는 달’ (카이오와 족)
‘잎사귀가 인사하는 달’ (오글라라 라코타 족)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아도 이렇게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장수는 아직 ‘잎사귀가 인사’하기 전이지만, 4월 말쯤 되면 연둣빛 새잎들이 인사하기 시작하겠지요.
엊그제까지 겨울이었던 장수에도 막 봄이 찾아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얼마 전에 씨앗을 넣은 양상추, 오이, 애호박, 쌈채소, 대파 싹이 올라와 있네요. 여기저기 쑥도 올라오고 푸릇푸릇한 기운이 백화골을 아름답게 바꿔놓기 시작했습니다. 완두콩, 비트, 봄무 씨앗 넣고 풀 올라오지 말라고 밭에 부직포를 대 주니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저녁에는 배추 잎을 갉아 먹는 벼룩벌레 쫓는 친환경 기피제를 쳐 주었어요.
부지런히 봄을 맞아야지요 4월, 머리맡에 두었던 나머지 씨를 뿌리고, 만물이 생명을 얻는 가운데, 생의 기쁨을 느끼며, 곧 더워지기 전에 열심히 일해보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