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랭지인 장수에선 여름에 상추 농사를 많이들 짓는다. 상추는 서늘한 기온을 좋아하는데, 한여름 불볕 더위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상추가 녹아내릴 때도 장수에선 품질 좋은 상추 출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노지 상추가 힘을 못 쓰는 장마철이나 태풍이 지나가는 철에는 상추값이 껑충 뛰기 때문에 잘만 하면 흡족하게 돈을 만질 수도 있다.
귀농 첫 해와 둘째 해에 우리도 연이어 2년 동안 여름 상추 농사를 지었다. 올해도 상추를 심긴 했지만, 소규모 회원 발송용으로 500주 정도만 심어 키우고 있으니 상추 농사 짓는다고 하긴 어렵다.
예전에 일본어 공부하는 한 선배가 "일본어, 처음엔 정말 쉬워보이거든. 근데 웃으며 시작했다가 울며 끝나는 게 바로 일본어야."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상추 농사 지으며 그 선배가 했던 얘기를 자주 떠올렸다. 상추 농사가 딱 그 꼴이다. 식구들 먹을 요량으로 텃밭에 휘휘 뿌려 몇 포기 키워 먹을 땐 상추처럼 쉬운 게 없어 보인다. 병충해도 없이 물만 주면 쑥쑥 잘 자란다. 아파트 베란다 손바닥 만한 화분에서도 무난하게 키워 먹는다.
그런데 이놈을 '농사짓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파종>우선 파종부터 벽에 부딪힌다. 본밭에 바로 파종하는 게 아니라 모종을 키워서 옮겨심어야 한다. 구멍 200개짜리 포트('육묘용 트레이'라고 하는 게 맞지만 그냥 '포트'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에 서캐만한 상추씨를 구멍 하나당 씨 한 톨씩 정확히 넣어줘야 하는데, 보통의 인내심을 가지고선 하기 힘들다.
80평짜리 작은 하우스 한 동에 3000주 정도가 들어가니 수 천 수 백 번 그 정교한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는 얘기다. 200구짜리 두 판만 넣어도 벌써 눈앞이 침침해지고 좌절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나온 게 씨앗 크기를 쌀알 크기 정도로 부풀린 코팅 씨앗인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재배 면적이 그리 넓지 않다면 차라리 육묘장에서 모를 사오는 게 낫다.
우리 동네에선 한 판에 5천원으로 통일돼 있다. <땅 만들기>상추 심을 이랑은 정성을 다해 자로 재어 깎은 듯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멀칭 비닐이 들뜨지 않고 찰싹 밀착되고, 어린 모가 비닐 속에 갇혀 타죽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이랑 폭은 상추 전용 멀칭 비닐의 넓이(6줄 짜리가 있고 8줄 짜리가 있는데, 6줄 짜리를 보통 많이 쓴다)에 맞춘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이 상추용 멀칭 비닐 가격이 또 엄청 비싸다. 속은 까맣고 겉은 하얀 이중비닐인데, 우리는 한 해 농사가 끝난 뒤 고이 접어 창고에 모셔놨다가 다음 해에 재활용했다.
<정식(아주심기)>새끼손가락 만큼 자란 모를 본밭에 정식한다. 씨 넣을 때부터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득도의 길이 이제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다. 열 주, 백 주, 천 주, 만 주.... 심고 심고 또 심는다. 심는다기보다는 흙에 그냥 꽂는다는 표현이 더 맞다. 상추는 복토를 안 하는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그리고 이제 득도의 길>아주 심기를 마쳤으면 이제 물만 잘 주면 된다. 보름 뒤부터 수확 시작이다. 동시에 본격적인 득도의 길 시작이다.
상추 1박스 규격은 4kg. 나폴나폴 가벼운 상춧잎을 모아 4kg를 채우려면 몇 장이나 따야 할까. 겨우 손바닥 만한 하우스 한 동 지었던 우리도 하루에 2~3박스, 많이 나올 때는 5~6박스까지 땄다. 한 상자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숙련된 상추 선배들의 경우 4~50분밖에 안 걸리지만 대신 손목, 허리, 어깨에 고질병을 달고 산다).
쪼그리고 앉아 한 박스 두 박스 채워나가다보면 손은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빨라지고 머리는 백지 상태로 텅텅 빈다. 세 박스 정도 되면 내가 상추를 따는 건지 상추가 나를 따는 건지 모를 정도의 경지에 이른다. 네 박스가 넘어가면.... 해탈의 경지가 보인다.
도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상추 농사 해볼 만하다.
<공판장>이렇게 어렵사리 얻은 마음의 평화는 다음날 나오는 공판장 경매 가격을 보는 순간 여지없이 깨져버리기 일쑤다. 장마와 태풍이 이곳저곳 쓸어가는 여름 한철 빼고는 상추는 어떻게 된 게 1년 내내 똥값이다.
그나마 이 '여름 한 철'을 노려보지만 장마와 태풍 특수를 맞추기도 쉽지 않다. 우리가 상추 농사 지으며 받았던 최고 경매가는 1박스 3만원, 최하는 3천원이었는데, 어쨌든 만원만 넘으면 잘 나온 셈 친다.
역시, 득도의 길은 쉽지 않다.
Tip. 상추 농사 지을 때 필요한 것들
1. 차광막 - 8시만 넘어도 차광막 안 씌우곤 하우스에서 상추 따기 힘들다. 사람도 힘들고, 상추도 맥없이 흐느적거린다.
2. 겉이 하얀 상추 전용 멀칭 비닐 - 상추는 더위에 약하기 때문에 여름 재배 때 특히 더 필요하다.
3. 상추 포장 비닐 - 상추 박스 안에 넣는 큰 비닐. 숨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있다.
4. 칼슘제 - 칼슘이 부족하면 잎이 흐물흐물하고 끝이 노랗게 되는 증상이 나타난다. 우리는 달걀껍질과 식초로 직접 만든 칼슘제를 사용했다.
5. 민달팽이 방제대책 - 거의 매일같이 물을 주다보니 상추 하우스엔 유난히 민달팽이가 퍼지기 쉽다. 우리는 민달팽이 피해가 그리 심하지 않아 그냥 보이는 대로 잡아죽이는 대책으로 나갔다.
6. 엉덩이에 붙이는 의자 - 고무줄로 엉덩이에 고정시켜 깔고 앉는 농사용 의자로, 상추 농사 지을 땐 특히 반드시 필요하다. 무릎 관절이 심하게 상하는 걸 막아준다.
7. 숙련된 포장 기술 - 아무리 상추 상태가 좋아도 포장을 잘 못하면 공판장 가격은 꽝으로 나온다. 2열5횡대로 마치 한 장을 쌓아 올린 듯 가지런히 잎 끝부분을 맞춰 쌓는다. 3kg가 넘어가면 상자 바깥으로 상추가 비져나오기 때문에, 상추 상자 크기에 맞춰 넓직하고 적당히 묵직한 판자 같은 것을 제작하여 한 번씩 눌러주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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